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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도니 Aug 20. 2024

지옥과 실존 사이에 선 자

소설 <구토>를 읽고서 2부 : 지옥, 3부 : 실존

2부 : 타인은 지옥이다.


이 말은 타인의 실존성과 내가 그들을 인식하는 그 사이의 간극이 비극이고 지옥이라는 의미다. 이 표현은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지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간이나, 지옥에 떨어져 버렸으면 하는 인간이나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고 말지 싶은 인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다시 안니와 로캉탱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둘은 각자 실존적 존재임을 깨닫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을 자신처럼 실존적 존재로 받아들이는 걸 거부한다. 이게 딱 그 상황이다. 오랜만에 친척 어른을 만나러 가면 네가 몇 살 때 그런 말 한 거 기억나냐? 요즘도 그거 하냐? 몇 년 전 혹은 십 년도 더 지난 내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그때와 나를 비교하는 거. 인간의 총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타자는 나의 단편적인 이미지 몇 가지를 수집해 어떤 명사나 형용사로 짤막하게 문장을 만들어서 편의적으로 규정한다. 지금의 나는 그 이미지가 아닐뿐더러 그 당시에도 그 문장은 아니다. 이런 이미지의 파편화는 지금 같이 실시간으로 sns를 하는 사회에서는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의 표현에는 책임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건 한 개인이 사회화되는 과정은 그 개인을 둘러싸는 타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라는 사람은 주변인물들과 상황에 따라서 약사, 딸, 친구 그리고 여행객등이 되는 거. 이 과정은 개인의 사회적 기능을 강화시키고 나를 인식하는데 중요한 과정이다. 아이러니한 건 여기서 나를 인식시켰던 그 이미지들이 다시 되돌아와 발목을 잡고 그리고 나는 그 이미지에 압도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도 있다. 타자로부터 부여받은 그 수많은 내 편린들을 나는 어떻게 통합해서 받아들일까. 과연 그 편린의 합은 나인가.




3부 :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1. 미술관


미술관은 아니고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내부

로캉탱은 부빌에서 초상화를 보러 미술관에 간다. 초상화가 미술관에 전시된다는 건 거기에 걸릴만한 사람이라는 거. 지체 높고, 모범이 되고 위업이 있는 자들. 감상객들은 화랑의 초상들 아래 쓰인 업적을 보며 감탄하며 위인들의 업적의 영광을 자신들이 누리고 있음에 감사했다. 인간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는 호랑이처럼 인류에 위업을 남기며 후대의 사람들은 죽은자의 지식에 편승해서 살아간다.


구글 스칼라의 검색창 아래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 아이작 뉴튼의 말이다. 선대의 유산(‘거인의 어깨’)을 통해 미지를 개척하는 것 (‘더 넓은 세상’)에 나는 조심스럽게 정반합(正反合)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습득하고(정) 한계를 찾아(반) 새로운 패러다임(합)으로 나아간다. 이는 로캉탱이 미술관에서 본 관람객들 처럼 선대의 지식에 대한 무조건적, 무지각적 수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류가 그 힘든 미션을 어떻게 완수하나 싶지만, 르네상스(정), 모더니즘(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합)만 보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정반합이다. 로캉탱은 그래서 말한다.  ‘잘 있어라 개자식들아’.



2. 공원


미술관을 나온 로캉탱은 ‘검은색’ 나무뿌리를 본다. 그리고 나무뿌리를 검은색이라 정의한 자신에 경악하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나무나 자신이나 다름이 없어서다. 안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쓸데없는’ 존재, 즉 쓰임을 목적으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그 속성을 공유한다. 그냥 우연히 거기에 로캉탱이 있고, 나무가 있다. 로캉탱은 우연한 현상을 하나의 개연성과 서사로 정의하려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와 관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현상을 표현하는 건 필요하다. 문제는 어떤 표현은 때론 위험하다. 예를 들면 어떤 리더를 보고 누군가는 리더십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강압적이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요즘엔 어떤 상황을 보고 중립기어 박는다라는 말이 있더라.


네 네 흥분 좀 가라 앉히시구요…


3. 부빌을 떠나며


로캉탱은 부빌을 떠나기 전 도시를 내려다보며 관성에 따라 살아가는 도시인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들의 내일은 어제 그리고 오늘과 같을 거다. 타성에 의한 삶은 물화된 삶이다.


https://youtu.be/ijmpTlN3HRI?si=K6DdliuMn4jlsD7F

로캉탱이 들은 곡, Some of These Days - Sofia Tuker


그는 떠나기 전 카페 랑데부 데 쉬미노에서 <Some of These Days>를 들으며 음악이 금강석과 같다고 하는데 이 표현이 특히 좋다. 음악의 견고하고도 완벽한 순수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음악은 로캉탱에게 실존의 메타포가 된다. 그러나 이 음악을 듣는 장면, 이건 소설의 앞부분에도 등장한다. 이 때 음악은 로캉탱에게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도구였다. 소설은 같은 장면을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해 주인공의 의식의 전환이 이렇게 바뀌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로캉탱은 음악으로 위안을 삼는 이들은 경멸한다. 이건 음악을 들으며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 것을 넘어서 자기 연민감에 도취되는 걸 말한다. 왜 우리는 지나간 일을 극화해 그 속에 나를 비극의 주인공인양 만들기도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상상은 씁쓸하고 달콤하고 정말이지 쓸데없다.


이 소설은 가장 완벽한 결말을 맺으며 끝난다. 로캉탱은 앞선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쓰리라는 결심을 한다. 그는 롤르봉의 전기를 쓰는데서 소설인 주인공의 실존을 고민하는 자로 바뀐다. 이는 로캉탱이 자신의 실존적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자 과거 자신과의 결별을 말한다. 그렇게 그는 부빌을 떠난다. 한 때 도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물화된 삶을 살았던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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