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같은 제주도의 햇살을 통째로 끌어안은 채, 또 하루가 시작됐다.
오늘은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다른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 날이다.
체크아웃과 체크인 사이 남는 시간에 해야 할,
사전에 정해두었던 코스를 아이에게 알려주었다.
“채연아, 오늘은 엄마가 제주도 여행 계획 짤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걸 할 거야.
협조 바랍니다 공주님?”
“네~”
대답은 참 야무지게 잘하는 우리 딸이다.
어디 가는지, 무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와 준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ㅎㅎㅎ
짐을 챙겨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파란 하늘을 보며 어제 갔던 예래포구 방향으로 다시 향했다.
인기 있는 곳이라서 오픈런을 해야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사전 정보를 들었기에,
카페 오픈 시간이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행히, 오픈 시간을 살짝 지나 도착했고,
넓은 주차장에 편안하게 주차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채연아, 여기 카페 이름 읽을 수 있어?”
“음... 어!? 내 이름이다!!”
“ㅎㅎㅎ읽을 수 있네 우리 딸?”
카페 루시아.
루시아는 아이의 세례명이다.
제주도 맛집을 검색할 때 우연히 알게 된 이곳에, 우리 루시아를 꼭 데리고 오고 싶었다.
통창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빵과 음료를 주문했다.
아침을 거르기도 했지만, 빵순이는 빵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둘이 먹기엔 과하다 싶게 빵을 담아 오는 나를 보고 딸이 고개를 흔든다.
“괜찮아. 남으면 싸 갖고 갈 거야”
제 발 저린 엄마는 먼저 아이에게 말하고야 만다.
폴딩도어로 된 창을 모두 열어두니, 살짝 더운 바람과 함께 파도소리가 밀려온다.
옆쪽으로는 박수기정의 웅장한 자태가 보이고, 앞으로는 꽃밭 뒤로 바다가 펼쳐지는 곳.
해리포터 책 읽겠답시고 캐리어에 집어넣을 땐 언제고, 왜 카페 왔는데 휴대폰만 보고 있는 것인지.
책을 좋아하는 엄마와는 참 다르다.
“이제 갈까?”
“응”
“엄마 사진 좀 찍자”
꽃밭 가운데, 많은 이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들어가 이리저리 포즈를 바꿔보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이가 활짝 웃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발동하는 엄마의 촉은 정확하다.
“너 사진 안 찍고 장난쳤지?”
아니나 다를까.
사진을 확인해 보니, 몇 장을 찍다가(대충) 카메라를 전환해 셀카를 찍어놓고는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괘씸하지만, 네가 귀여우니까 이 사진은 지우지 않을게”
남은 빵을 포장하고, 차에 올라탔다.
“자, 우리 루시아. 이름 똑같은 카페에 온 소감이 어떠십니까?”
“신기했어”
“그렇지? 엄마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거였어.
다음 코스도 기대하시라~~”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예래생태마을을 다시 한번 지나가게 되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가니, 마을 안쪽 좁은 골목길로 안내를 한다.
“아... 여기 운전하기 힘드네.”
이 말을 하는 순간 맞은편에서 차량이 온다.
“후... 각이 나오나...”
핸들을 돌렸다 풀었다를 반복한 끝에 겨우 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마련해 주고,
얼마간의 시간이 걸려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을은 참 예쁜데, 초보 운전자에겐 힘들었던 곳.
예래마을에게 안녕을 전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신도포구.
이곳은 돌고래가 자주 나오는 곳이라고 해서 야심 차게 코스에 넣은 곳이다.
어릴 때 거제도에 여행 가서 벨루가를 만지고 사진 찍은 게 다인 아이에게,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돌고래를 보여 주고 싶었다.
날씨가 너무 더운 탓인지, 아직 돌고래가 출몰할 시간이 아니었던 건지,
해안가에 주차된 차가 많지 않았다.
편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어?”
차 앞 유리를 문득 보는데, 이상했다.
“이거 뭐지? 선팅 새로 한 게 갈라진 건가...”
얼른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남편은 곧장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 답장에, 내 마음이 와장창 깨졌다.
“돌빵?”
아니, 돌빵이 웬 말인가.
내가 주행중일 땐 돌을 맞은 기억이 없는데,
그럼 카페에 주차한 사이에 누군가 지나가면서 돌을 날렸다는 것일까.
통창 바다뷰를 즐긴 대가가 이거라니.
너무 가혹하다.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언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고,
유리값에 한 지 얼마 안 된 선팅값까지 생각하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돌을 맞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갈라진다고?”
남편은 남의 속도 모르고 친절하게 돌빵을 최초로 맞은 지점까지 표시해서 보내준다.
“시야 거슬리지 않으면 그냥 타. 100만 원 넘겠는데?”라는 말과 함께.
후... 초보가 시야에 거슬리고 말고가 어딨냐 ㅋㅋㅋ
어쨌든 돌고래는 봐야 하니, 바닷가 안쪽으로 아이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바위에 걸터앉아 바다를 잠깐 보다가 돌고래를 마냥 기다리기 지쳤는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느라 바빴고, 엄마 더워와 돌고래 언제 나와? 를 연신 돌아가며 내뱉었다.
“너무 더우면 저쪽 정자에 가서 앉아 있을래?
엄마가 돌고래 나오면 전화할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내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 이제 슬슬 돌고래 출몰 타이밍인가.
배 한 척이 지나가더니, 배가 그리는 물줄기 사이로 돌고래 두 마리가 모습을 보였다.
“채연아, 빨리 와. 돌고래야”
어슬렁어슬렁, 돌고래보다 더운 게 더 싫은 아이가 걸어왔다.
그리고, 이내 돌고래들은 사라졌다는 슬픈 사실.
“엄마, 돌고래 어딨어?”
“집에 갔나 봐. 그러게 빨리 오지”
“아니~ 엄마가 저쪽 가서 쉬고 있으라며”
“돌고래 두 마리밖에 못 봤어.
다음에 우리 돌고래 많이 나오는 곳으로 다시 가자.”
“그래”
와장창 깨진 마음과, 돌고래를 많이 보지 못해 더해진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동을 걸었다.
다음 코스는 오설록 티뮤지엄이다.
아이에게 녹차밭 구경도 시켜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지인들에게 줄 차도 사려고 했는데,
티 뮤지엄 근처부터 차가 꽉꽉 막히기 시작했다.
도로안내표지판을 보니 항공우주박물관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채연아, 차 너무 많다. 아이스크림은 다른 데 가서 사줘도 되지?”
“응, 상관없어~”
그래, 넌 그냥 아이스크림이면 되는 거겠지.
얼른 차를 돌려 항공우주박물관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 없이 표지판만 보고 가다니, 엄청난 성장이다!
항공우주박물관에서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부터 먹이고,
당을 끌어올린 후 본격 “구경”에 나섰다.
이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는 아이이기에, 사실 나도 크게 기대는 안 했다.
그런데 아이가 별자리를 보고 나서는, 별자리 무드등 만들기 체험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이런 데 왔으니 특별한 체험 하는 건 나쁘지 않지.
아이가 체험하는 동안 나는 아이 사진도 마음껏 찍고, 와장창 깨진 마음을 수습했다.
다음 호텔에 체크인하기 위해 다시 제주도 길을 달렸다.
생전 처음 운전하는 동네인 데다, 도로는 왜 이리 헷갈리는 것인지.
도로 옆에 자전거 도로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던 자전거 도로가 아닌,
차가 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널찍한 도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널찍한 도로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잠시 들어갔다 온 나란 초보운전자 ㅋㅋㅋㅋ
정말 제주도 초보 운전은 너무나 스펙터클하다.
호텔 입구에 난 길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더 지나가서 유턴해서 들어와야 하는 조금은 이상한,
그렇지만 멋진 수영장이 있는 호텔로.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수영장에 가야 하는데(그래야 비싼 호텔 본전 뽑는데)
아이는 귀찮다며 수영을 하기 싫단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길 왜 비싼 돈 내고 예약했는데.
결국 수영장에 내려가서 “수영장” 사진만 찍고 다시 방에 올라왔다.
“엄마 계속 운전했더니 너무 피곤하다.
우리 잠깐만 쉬고 저녁 먹으러 나가자”
아이가 노래 부르던 흑돼지 구이집에 예약을 해놓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엄마, 6시 넘었어.”
1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아이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아까 찍지 못한 호텔 침구와 어매니티 사진을 찍고, 로비로 내려왔다.
예약을 했음에도 주차장은 만차였다.
“너 먼저 들어가서 자리 잡고 있어. 네이버 예약했다고 하고. 엄마 주차하고 들어갈게.”
이제 막 식사를 마친 가족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기다렸다 주차하고 식당에 들어가니
아이가 자리를 잡고 상차림을 보며 그래, 이거지 라는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년 전과 달라진 것 없는 인테리어를 둘러보다 보니, 이런 문구가 보인다.
[고기를 먹었더니 위장이 싹 나았다]
이건, 오늘 와장창 깨진 내 마음을 위로하는 말인가?
이미 깨진 유리 어쩌겠냐, 쓰린 속을 콜라로 건배하며 달래 본다.
위장뿐만 아니라, 낮에 와장창 금이 갔던 내 마음의 스크래치까지 육즙으로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고기에 비빔국수까지 시켜서 국수에 고기를 돌돌 말아 야무지게 먹는다.
그래, 이 맛에 너 데리고 다니는 거지~
완연한 보름달이 된 달을 보며, 호텔로 들어와 노트북을 폈다.
“엄마 잠깐 일 해야 되는데, 넌 뭐 할래?”
“나 해리포터 책 볼래”
책을 보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 와중에 이상스러운 자세로 책을 보고 있어서 엄마와, 사진을 받은 아빠까지 빵 터지게 했지만,
우리, 오늘도 안 싸우고 잘 보냈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