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여행의 시작과 아찔한 순간들을 지나,
이제야 숨을 고를 수 있는 여행의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비싼 호텔에 묵고 있으니,
하루 정도는 조식 뷔페를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체크인 당시 예약해 두었던 조식.
좋아하는 당근라페, 수프, 달걀프라이를 시작으로 정갈하게 접시에 담아 본다.
음~ 이 정도면 사진 찍기 딱 좋은 담음새인걸?
뿌듯해하며 여유로운 조식을 즐긴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조식 레스토랑에서 보이는 수영장은 윤슬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와, 채연아 저기 봐봐."
아침을 먹는 우리의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인스타용 사진 찍기 딱 좋은 호텔 인피니티 풀에 등장한 수영모의 아주머니였다.
체육센터 수영장에나 있을 법한 원피스 수영복, 수모, 수경까지 장착한.
그러나 굉장한 수영 실력을 가지신 분이 유유히 아침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순간, 내가 챙겨 온 수영복들이 떠올랐다.
수영보다는 사진이 목적인 나의 핑크핑크한 수영복들.
수영장인데 수영장이 아닌 듯한 공간.
어울리지 않는 그분의 착장과 수영 실력이 묘하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10시쯤 방에 올라가 소화를 시키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의 수영복을 입고, 아이에게 또 인생샷을 남겨줄 것을 주문한다.
원장님의 섬세한 부항 설계 덕분에,
파란 수영장 위로 내 핑크색 수영복은 아무런 흔적(?) 없이 선명하게 빛났다.
사진 찍기 귀찮은 아이는 또 연사를 눌러 버린다.
그래, 아무렴 어때.
그중에 하나쯤은 인생샷이 있겠지.
살이 타 들어가는 듯 따갑기까지 한 제주의 태양 아래 물놀이를 하다 지친 아이가
휴대폰을 보며 눕더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 안 놀아?"
"나 힘들어."
"별로 안 놀았잖아."
"그럼 엄마가 놀아 줄 거야? 아빠랑 오면 아빠가 물놀이 같이 해주는데."
"그래! 엄마가 놀아 줄게. 들어가자."
아이 손을 잡고 수영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껏 수영장 있는 비싼 호텔을 예약했건만,
아이는 예전처럼 물놀이에 흥미가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제 갈까?"
"응, 다음엔 어디 가?"
"비~~ 밀."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또 떠난다.
서귀포에서 성산까지 가는 길은 넓고도 한적했다.
제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시골 같기도 한 길들을 지나,
성산에 가까워지자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아이가 가고 싶어 했던 아쿠아리움에 도착했다.
명절이라 가족 방문객이 많아서인지,
입구부터 주차장은 물론이고, 양쪽 도로에 차가 가득이다.
빈자리를 찾아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니,
안내해 주시는 직원분이 주차금지 표지판이 서 있는 곳에 안내해 주신다.
"어, 여기 주차해도 되나요?"
"그냥 대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주차를 하고 나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채연아, 우산 챙겨서 내려~"
아이는 성큼성큼 엄마보다 앞서 걷는다.
엄마는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한 장이라도 더 담아 보기 위해
이리저리 구도를 바꿔 가며 연신 휴대폰 카메라를 누른다.
"엄마, 빨리 와~"
마침 16시 20분 마지막 공연을 앞둔 시각,
갑자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자며 조른다.
한눈에 봐도 귀여운 모양의 아이스크림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와, 너무 귀엽다~ 넌 뭐 먹을래?"
"음... 난 쇼콜라."
"그럼 엄만 돌핀 먹어야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앙증맞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두 입 베어 물고 나니,
6시까지 운영인데 4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해 밀려오는 짜증이 한숨 가라앉는 눈치다.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아! 안돼!!"
아이스크림이 바닥으로 자유 낙하를 해버리고 말았다.
"조심히 먹지~ 휴지통에 버리고 이제 공연 보러 가자."
"아냐 엄마. 아직 3초 안 지났어. 이거 봐. 깨끗하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3초 룰은 들었는지,
아이스크림을 툭툭 털어내고는 마저 입에 넣으며 배시시 웃는 딸.
"어휴, 너 그러다 배 아파도 엄마는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오션 아레나 공연장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해녀, 망사리의 모험"이라는 아쿠아 마린 쇼를 감상할 시간.
연습을 얼마나 한 건지,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봤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인데, 퀄리티는 어른들이 즐기기에도 훌륭한 정도였다.
특히 남자 세 분이 팀을 짜서 묘기를 부리는 부분에서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바다사자 치코의 이야기와 재롱잔치(?)가 이어졌다.
아이는 옆에서 계속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치코에게 쏙 빠진 듯했다.
묘기를 부린 후 관객들에게 한쪽 다리를 흔들며 박수를 유도하는 모습,
재빠르게 헤엄치는 모습, 메롱하는 모습까지,
어른인 나도 어린아이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즐기기에 충분했다.
공연이 끝난 후, 오션 아레나 공연장에서 수족관으로 나오는 길에
창문에 그려진 돌고래와 손글씨가 우리의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해 주는 것 같았다.
"제주 오길 정말 잘했어!"
"채연아 이거 봐."
"오~ 진짜 제주 오길 잘했다 엄마."
대형 수족관 앞에서 어느새 나와 키가 같아진 아이와 사진도 찍고,
수중 생물들을 보며 계속되는 아이의 연사 타임~
오랜만에 온 아쿠아리움은 아이도, 나도 동심으로 하나 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폐관 시간이 다 되어 하나둘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하고,
우리가 밖에 나왔을 때는 차도, 사람도 절반 이상 모습을 감춘 뒤였다.
비가 오던 하늘은 어느새 먹구름만 잔뜩 있고,
먹구름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수고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듯,
붉은 태양이 뒷모습을 비출 뿐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음 숙소를 향해 운전대를 잡았다.
호텔 앞까지는 다행히 잘 갔는데, 금세 어두워지다 보니 입구를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또 호텔 주변을 한 바퀴 삥삥 돌아 다시 천천히 찾아오긴 왔는데,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
옆에 자갈이 잔뜩 깔린 공터 주차장에 딱 1대 자리가 있었다.
"와, 저기 주차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낭떠러지(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체감상 저기로 떨어지면 죽겠다 싶을 만한 높이였다),
옆뒤로는 내가 옴짝달싹할 만한 공간이 전혀 없는 자리.
이 자리가 아니고서는 주차할 공간이 아예 없었기에,
무한 핸들 돌리기 기술을 쓸 수밖에.
주차센서가 쉴 새 없이 삐 소리를 낸다.
조금만 더 하면 팔에 알이 배기겠다 싶을 때쯤, 각도가 나왔다.
"오, 채연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이대로 앞으로 조금만 더 가서 다시 뒤로 가면...
성공이다. 드디어.
"와~~ 엄마, 해냈어!!"
"채연아, 엄마가 다시 앞으로 차 뺄 테니까 짐 먼저 내리고 주차하자."
"네~~~"
엄마가 주차하느라 애쓰는 동안 아이도 긴장을 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가 박수를 치며 엄마의 노고를 치하해 준다.
가방을 모두 빼고, 자갈길을 힘겹게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까지 클리어.
운전은 내가 했는데 왜 침대엔 네가 먼저 뻗는 거니 ㅎㅎㅎ
세 번째 숙소를 성산 일출봉에서 가까운 곳으로 예약했는데,
여행자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많이 찾는 곳답게,
침대 두 개를 제외하고는 살림살이도, 공간도 크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캐리어를 잘 펼쳐 두고는 아이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섰다.
사전에 검색해 둔 곳은 횟집과 고깃집, 햄버거집 등이었는데 아이는 역시나 고기를 1순위로 꼽았다.
"또 고기야? 고기 안 지겹니?"
"응, 안 지겨운데?"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꽤 깔끔해 보이는 식당에 들어섰다.
불판도, 반찬도 하나같이 깔끔했다.
아이는 고기 한 점 먹을 때마다 김치와 쌈무를 올려 야무지게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여기 고기 추가요~"
"엄마, 나 국수 먹어도 돼?"
"여기 물냉면도 추가요~"
엄마는 국수 한 가닥 먹어볼 틈도 없이 싹싹 비운 아이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식당을 나섰다.
"우리 지금까지 세 군데 갔잖아. 여긴 몇 등이야?"
"음... 고기 육즙은 여기가 제일 미쳤는데, 전체적으로는 까망돼지가 1등이야."
역시나, 미식가인데 대식가의 답변답다.
소화시키기 위해 아이와 손을 잡고 호텔 주변을 걷는데,
도시와 다르게 거리가 밝지도 않고, 한적한 기분마저 든다.
"어! 엄마, 이게 설마 공중전화야?"
"응, 맞아. 여기에 동전이나 카드 넣으면 전화할 수 있어."
"와~~~~ 나 공중전화 태어나서 처음 봐."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가 웬일인지 전화 거는 시늉을 하며 포즈를 취해 준다.
아이에게는 길 한복판에서 동전을 넣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이 기계가
사진 찍히는 것도 잊을 만큼 신기했나 보다.
한 시간쯤 어둑한 길을 따라 산책을 하고,
호텔로 돌아와 서늘해진 밤공기에 차가워진 몸을 쌍화탕으로 데워 본다.
마침 아이가 챙겨 온 인형이 귤을 들고 있어 함께 사진도 찍어 본다.
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물보다는 아빠와 노는 게 더 좋았던 아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물론 좋아하긴 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게 좋았던 엄마.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운 10월 8일의 제주.
우리는 또 그렇게 오늘 하루, 서로에게 한 발짝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