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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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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머스캣 Nov 15. 2023

무명씨, 안녕하세요.


 무명씨, 안녕하세요. 최근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를 읽은 저는 편지 형식의 글쓰기를 해보고 싶어 졌습니다. 이 책에선 여성 작가 두 명이 편지를 주고받아요. 두 여성은 견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서로의 세계를 아름답게 바라보며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소울메이트에게 편지를 쓰면 좋겠지만 저는 무명씨에게 글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무명씨는 내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기 떄문이에요. 현실의 인물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무명의 이야기>를 잘 읽고 있습니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 제가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시간을 지나오셨습니다. 지금도 지나가는 중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무명씨의 삶의 무게도 이미 충분히 무겁겠지만 가끔 제 얘기를 들어주시면 좋겠다는 무례하고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사는 당신이 현재를 살아갔으면 바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무명씨,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호칭은 한국에선 암묵적으로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곤 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씨'라고 불렀다가는 당사자와 주변의 의아한 눈빛을 받을 수 있어요. 저는 감히 무명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살지만 저는 현재에 사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어른이기도, 어른이고 싶기도 해서요. 저는 여전히 속 시끄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불면증은 나아서 약 없이도 잠은 곧잘 자고 있어요. 매일같이 꿈을 꾸는 것은 여전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사지가 절단 나는 소리와 감촉이 느껴지는 끔찍한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습니다. 제때 자고, 제때 먹는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깨달은 것 같아요.


 무명씨, 무명씨는 삶에 지쳐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타인의 불행에 깊이 잘 공감하고, 깊고 넓은 인간관계를 가졌다고 자부했던 시절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스스로의 능력과 성품에 대해 꽤 괜찮게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노력하기 위해 생각보다 거대한 노력을 들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명씨, 저는 제 성격이 굉장히 모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저는 무명씨처럼 남들이 소위 말하는 '굿 리스너'의 자질이 부족하고, 솔선수범하여 궂은 일을 맡으며, 사람의 단점보다는 매력을 찾아내고, 인간의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시시때로 평가합니다. 사람의 단면을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판단합니다. 그 섣부른 판단은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비약이 심할 정도로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저는 살갑고 다정한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곱고 다정한 말씨보다는 냉랭하고 툭툭 던지는 말씨를 가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중을 오묘하게 감추며 돌려 말하는 것을 참 싫어해서 그런 태도에 냉하게 반응하는 옹졸함을 가졌습니다.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참 싫습니다.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면모를 갖고, 과시하고, 남을 의식하고, 과장하는 사람들이 참 싫습니다. 그들에게도 철없을 권리가,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음에도 저는 그들을 혼자 평가할 권리가 있으므로 마음속으로 그들을 한껏 싫어하고 비난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습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은 사실 귀찮습니다. 내 남동생 말고는 아무도 제 성에 차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작은 단점들을 상쇄할 장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근데요. 정작 저도 단점으로 가득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단점이 눈에 참 잘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표면적인 행동에 숨겨진 이면의 의도를 눈치채는 능력이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틀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맞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얍삽한 눈치만 늘어서 사람을 거르는 거름망이 더욱더 촘촘해지고 있습니다.


 무명씨, 그러나 제가 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남이 저에 대해 하는 평가를 함부로 예상하곤 합니다. 그 예상은 대부분 망상증 환자 수준으로 과하고 부정적입니다. 문자 하나를 보내놓고 그 사람의 의중을 온갖 부정적 망상에 맡겨놓고 혼자 파악합니다. 그 판단의 대부분은 틀렸습니다. 무명씨도 아셔야 됩니다. 지금 무명씨가 의식하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는 생각보다 무명씨에 의해서 곡해되고, 과장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혼자서 상상을 키우지 마시고 뛰어들어 실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실체는 생각보다 보잘 것 없습니다.


 여튼, 제 편지에서 느끼셨겠지만 무명씨 저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가리려고 너무 많은 생애를 들였습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나고 자란 곳에서 어느정도 가질 수 있는 선함의 총량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함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못 배운 사람'이라고 여겨요. 선함과 더불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지키려 나서는 것은 어릴 때 배우지 못하면 성인이 돼서도 터득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명씨와 비슷하게 고달픈 유년을 겪고, 커서도 제게 닥치는 악재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 터득할 수 있는 선함과 보호 능력은 부모와 세상이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에요. 그걸 받지 못한 우리들의 삶이 불행할 수밖에 없던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무명씨, 제 말에는 요지가 없습니다. 제가 전해 드릴 수 있는 고무적인 말이나 조언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편지를 쓰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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