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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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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머스캣 Jan 09. 2024

감히 부모님께 '꼴 보기 싫다'고 해도 될까요?


 무명씨,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요즘 살사 추랴, 일 하랴, 마음 추스르랴, 스페인어 배우랴, 운동하랴 통 정신이 없었어요. 부지런하기보단 무언가에 쫓기는 바쁜 삶을 살았달까요. 슬 평정심을 되찾을 겸 오늘 집 대청소를 했어요. 집 상태가 엉망이었거든요. 부엌은 여기저기 음식물이 튀어있는 인덕션 주변과 때가 낀 채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들, 정리되지 않은 각종 건강식품과 잡동사니들, 꽉 들어찬 식기건조대, 그리고 군데군데 얼룩져 있는 바닥까지 정말 완벽히 난장판이었어요. 사실 부엌뿐이었을까요, 거실, 방, 욕실 모든 곳이 초토화되어 있었답니다. 구차하지만 이렇게 집이 망가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집이 망가져 간다는 건 제 정신이 망가져 가는 것과 어느 정도 양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글쎄 아빠 때문이에요. 무명씨, 듣기 싫고 그저 음울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한 번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말할 곳이 없어 답답해서 죽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9월 즘, 지방에 떨어져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계신 아빠에게서 대뜸 연락이 왔어요. 발가락이 부러져서 당분간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요.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셔서 무거운 물건에 충분히 다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는데 여태 별일 없다가 이제야 큰 건이 하나 터졌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웬 걸, 골절 정도가 심해서 약 6개월 정도를 쉬어야 한다고 하네요? 그것도 저희 집에서요. 저와 남동생이 살고 있는 아담한 투룸말이에요. 사실상 혼자 살면 딱 쾌적한 투룸에 두 명이 낑겨 살고 있는 중인데, 거기에 아빠가 와서 함께 지낸다네요. 무려 6개월을요. 뭐, 일단 다친 아빠를 내쫓을 수 없으니 당연히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거죠. 


 그렇게 아빠가 들어오고 아빠는 남동생 방을 차지했어요. 남동생은 거실에 있는 소파로 쫓겨났고요. 그렇게 매일 같이 집에서 백수로 지내는 아빠가 남동생 방의 침대에서, 하루에 3시간 자며 택배 두 곳의 일을 하는 남동생은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어요. 가끔 제가 소파에서 자고 동생이 제 방 침대에서 자기도 해요. 뭐, 어쩔 도리가 있나요. 나이도 많고, 발을 다친 아빠가 방을 써야 하고 자연스레 남동생방을 차지해 버리신 걸요. 소파 맞은편에 있던 식탁은 더 이상 식탁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남동생의 진열대, 옷장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비좁은 투룸에 세 명의 성인이 끼여 살면서 집은 점차 엉망이 되어 갔어요. 살림이 2인분에서 3인분으로 느는 것은 소화하기 생각보다 버거워요. 그렇다고 또 불평할 수도 없죠. 아빠는 일을 하다 다치셨고, 지금 환자이고, 내 부모니까요. 


 그러나, 우울증 약을 단약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게 아빠와 함께 지내고서부터 다시 위기가 찾아오고 있어요. 다시 병원을 가서 약을 먹어야 하나 고민하기를 여러 번,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아빠가 나갈 거라는 계획을 듣곤 버티고 있어요. 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드냐, 설명하려니 한숨만 나오고 벌써 가슴이 답답하네요. 


 남동생 방에 콕 틀어박힌 아빠는 하루 온종일 한숨을 쉬세요.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온 집안에 아빠의 한숨이 울려 퍼져요. 그냥 한숨이 아니라 정말 짙고, 듣는 사람도 파묻힐 것 같은 한숨이랄까요. 제 남동생이 이 흉내를 정말 잘 내는데 들려드리고 싶네요. 이 한숨을 매일 같이 한집에서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어느새부턴가 한숨에 욕이 같이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살면서 내가 들은 욕을 다 합쳐도 아빠가 이 집에서 한 것보단 적을 거예요. 혼자서 중얼거리는 아빠의 한숨과 욕을 시시때때로 듣고 있자니 정말 미쳐버릴 것 같더라고요. 몇 번은 맞대응하듯 제가 더 깊은 한숨을 아빠 들으란 듯 거실에서 쉬기도 하고, 대놓고 아빠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의 삶이 충분히 아빠에게 암울하리란 것은 알지만, 닥친 현실은 받아들이고 신세지는 자식들까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더 저를 분노케 하는 것은 아빠의 한숨과 욕의 원인이 투자 실패라는 거예요. 약 십오년 전쯤 양복에 넥타이를 매일 하고 서울로 출근하던 아빠는 회사의 부도로 공사 현장일에 뛰어들었어요. 그 이후로 아빠가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모습은 절대 볼 수 없게 되었네요. 여하튼, 그렇게 현장일에서 나름 비계를 쌓는 일로 전문성을 쌓고 경력일 차차 만들어가서 아빠는 적지 않은 월급을 받게 되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가계빚도 차차 갚아가는 중이었답니다. 그러던 중 칠레의 공사 현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아주 머나먼 타국인 칠레의 생활은 당연히 힘들고 외로웠지만 한국에서 받던 돈의 두 세 배는 더 벌 수 있었어요. 그렇게 생고생을 해서 벌어온 돈을 아빠는 투자로 몽땅 날렸습니다. 한국에서 일해서 벌었던 돈, 칠레에서 벌어온 돈 모두에 심지어 빚만 남기게 되었어요. 그때의 아빠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마침 딱 그 시기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구직이 매우 힘든 상황이어서 아빠는 집에 머물며 죽음의 냄새와 모습을 흘리며 다녔어요. 그걸 보는 저희도 속이 문드러져 갔습니다. 아마 그때 아빠의 수명이 10년은 줄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그때는 아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투자를 했던 아빠의 조급한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고, 투자로 그간 피땀눈물로 벌어온 돈을 모두 날리고 빚만 남았어도 측은한 마음으로 품을 수 있었습니다. 당장 급한 빚을 메우기 위해 제가 팔백만 원을 드리고, 이천만 원짜리 대출을 제 이름으로 받아 드렸어요. 돌려 받을 수 없는 돈임을 알고 있었고, 당시가 약 3년 전이니 지금보다 저경력인 제가 오밀조밀 모은 돈을 드리려니 마음이 쓰리더라고요. 그래도 부모님이 지금껏 물심양면 나를 키워준 것을 생각하면 이 돈을 아까워하는 내 자신이 참 못난 것이다라고 질책하며 견뎠어요. 아빠가 잠시 넘어진 것뿐이라고,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유년시절의 든든했던 보호자로서의 아빠의 모습이 제게 남아있었거든요. 


 그러나, 그 일이 있고 약 3년 뒤인 지금 아빠는 똑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네요. 3년 전 내 이름으로 대출해 준 2천만 원의 원금을 왜 지금까지 상환하지 못하고 있는지 물었어요. 꾸준히 일을 하고 소득을 내고 계시는데도 원금을 갚지 못한다는 것이 의아했거든요. 아빠가 기존에 갖고 있던 빚을 다달이 갚는다고 해도 분명 남는 돈이 있을 터인데 이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남는 돈으로 또다시 투자를 하고 있었더랍니다. 그렇게 발이 다쳐서 쉬는 지금까지도 그나마 남은 돈으로, 산재 처리받은 보험금으로 투자를 하느라 남동생에게서 뺏은 그 방 안에서 혼자 미친 사람처럼 욕과 한숨을 섞어가며 우리 남매에게 막대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어요. 이제는 아빠를 이해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네요. 무명 씨라면 가능하시려나요? 혼자 귀신 들린 사람처럼 한숨과 욕설을 끊임없이 뱉는 아빠의 모습을 견딜 수 있으신가요? 전 못하겠어요. 제 안락한 보금자리였던 집에 오기가 싫어집니다. 


 요즘 남동생은 새벽에는 쿠팡, 낮에는 일반택배를 하며 투잡을 뛰고 있어요. 밤 10시에 나가서 새벽 6시에 쿠팡 배송을 마치고, 다시 새벽 6시에 나가서 일반택배 배송을 마치고 오후 5시쯤 들어와요. 그리고 3-4시간 정도 자다가 다시 밤 10시에 쿠팡을 나갑니다. 날이 갈수록 더 여위어가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오는 동생을 보는 제 마음이 다 비틀어지는 것만 같아요. 그런 동생이 편한 침대에서 자지 못하는 것이 아빠 때문이란 게 화가 나고, 투자에 산재로 받은 보험금을 날릴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놀고먹는 동안 생활비라도 냈으면 좋았을 것을요. 아빠는 단 한 푼도 내지 않고 우리 남매가 사다 놓은 음식을 축내고 있어요. 부모에게 음식을 축낸다니 참 못난 표현이네요. 그러나 저와 동생이 가끔 하는 대화에는 아빠가 '꼴 보기 싫다'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어요. 저도 동생도 이젠 한계가 찾아온 거죠. 아빠가 남동생의 방문을 닫고 들어가 하루종일 투자창과 유튜브만 보고, 잘 씻지도 않고, 허리는 더 굽고, 그 와중에 관절과 신경이 아프다 호소하고, 커피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고, 변기에 오줌을 여기저기 튀겨놓고, 사다 놓은 음식을 속속들이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네요.  


 아빠가 더이상 제 보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모가 아니란 것을 여실히 깨달아버렸어요. 그나마 유년시절의 아빠를 기억하며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내 아빠고, 언제든 내게 어려움이 닥치면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환상'에 기대 살아왔던 것 같아요. 이번에 같이 살면서 그 환상이 산산조각이 났어요. 다행이기도 한 것 같네요. 예전에는 아빠가 죽는 날을 상상하면 막막하고 두려웠거든요. 나의 유일한 보호자가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엄마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철부지라는 걸 잘 알아서 단 한 번도 기댈 수 없던 존재였기에 그나마 아빠를 보호자로 제가 만들어 놓고 있었나 봐요. 근데 지금은 아빠가 죽는 게 예전만큼 두렵진 않네요. 아빠가 돌아가신다고 제게서 보호자의 상실은 일어나지 않을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저에겐 이미 보호자가 없거든요. 마음이 쓰립니다. 


 이 세상에 던져져서 자식으로서 애착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수도 없었고, 보호를 제대로 받은 적도 없는 제가 이제는 부모의 남은 삶의 보호자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해요. 남동생도 저도 이 끔찍한 현실에 조금씩 잠겨가는 중입니다. 우리내의 삶은 언제든 엄마와 아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상사태에 대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 찾아오면 엄마와 아빠는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동생은 군대에 가기 전 고등학생 때부터 택배 상하차 알바를 하며 벌어놓은 오백만 원 돈을 엄마 카드빚을 갚아주었고, 저는 엄마가 사이버대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그것이 자신의 평생 숙원이었노라고 하여 입학금을 내주었어요. 그리고 엄마가 필요할 때 급한 생활비를 대주었어요. 동생은 군대에 다녀와서도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주었어요.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동생은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는데도요. 아빠는 지방에서 일하며 가끔씩 연락해 와서 급한 돈을 제게 빌려갔습니다. 빌려간 게 아니라 받아갔어요. 그렇게 늘상 나의 삶은 엄마와 아빠를 위한 ATM 모드로 켜져 있었어요. 남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동생도 지금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둘 다 '돈을 왜 버는지 모르겠다.', '돈을 벌어도 딱히 쓸 데가 없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기계처럼,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그저 돈을 버는 거예요. 지겹습니다. 아주 지겨워요. 결국엔 내가 번 모든 돈이 부모를 봉양하는 데에 들어갈 거란 걸 아니까 우리는 점점 더 무기력해집니다. 


 지금 집에서 나를 미치게 하는 아빠부터 어서 다리를 회복해서 다시 일을 하러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조금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지금 아빠의 건강 상태로 봐선 다시 복귀하신다고 해도 일을 오래 못 하실 것 같아요. 아마 그 이후의 노후 대비도 우리 남매가 해야겠죠. 엄마는 오늘도 대뜸 연락해선 스케이트를 배우다가 팔목이 부러졌다고 수술비 150만 원을 급하게 보내달라고 하시네요. 온 머리가 조여 오는 듯한 두통과 스트레스가 몰려왔으나, 어쩌겠어요. 부모인데, 다쳤다는데 보내줘야죠. 저는 더 이상 돈을 버는 재미가 없습니다. 벌어 봤자 부모님께 쓰일 거니까요. 엄마와 아빠 둘을 모두 봉양하느라 죽을 맛입니다. 엄마는 내게 150만 원의 수술비를 받아가 놓고, 거기에 아픈 엄마를 보러 한 번도 안 온다며 속상함을 토로합니다. 그에 저는 폭발했어요. 나는 너무도 지쳤으니 내게 돈을 바라거나, 감정을 바라거나 둘 중 하나만 요구하라고요. 돈을 주고 나면 저는 며칠을 마음을 추스르며 견뎌야 하는데 그에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다고 자식의 도리를 운운하는 엄마에게 화가 났어요. 죽을병도 아니고 엄마가 취미 생활하다가 골절된 걸요. 누군가는 매정하다고 할 테지만 저는 너무 지쳤습니다. 돈과 감정을 모두 쏟을 수가 없어요. 제발 하나만 합시다 하나만. 


 자식된 도리에 갇혀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 나는 부모의 도리는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나의 유년동안 내게 물심양면 쏟아부었으니 그 이후는 자식에게 바라면서 살아도 되는 게 부모의 도리일까요? 나의 20년을 그들이 책임졌고, 나는 그럼 20년의 세 곱절은 더 살 텐데 그 기간 동안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맞는 걸까요? 20년 투자, 이후 60년 노후 보장이면 나쁘지 않은 자식재테크 같습니다. 이런 메마른 글을 쓰는 나를 보니 마음이 많이 멍투성이인 것이 틀림없네요. 한 때는 엄마와 아빠에 대해 글을 쓰다가 울컥거리는 마음에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가슴과 머리가 더 차갑게 식고 있습니다. 


무명씨, 저는 슬픔은 나누면 반이 아니라 두 배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모난 슬픔을 나눠드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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