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원피스
언제부터인지 계절이 바뀔 때쯤 이면 커다란 보자기에 온갖 옷이며 화장품들을 잔뜩 싸서 짊어지고 달동네로 찾아오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을 보따리장수라고 했지요.
그 보따리를 펼치면 엄마들의 마음을 쏙 빼앗는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특히 엄마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쌈짓돈을 꺼내게 하는 것은 동동구리모와 파우더 분가루 그리고 새빨간 루주등이었습니다.
허리띠 졸라매고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아끼고 또 아끼는 엄마의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게 되는 날은 보따리장수가 오는 날입니다. 엄마가 유독 좋아했던 것은 빨간색 루주였지요.
화장품하나 변변치 못했던 엄마는 보따리장수가 오는 날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보따리장수를 찾습니다. 물건을 넓게 펼쳐야 할 공간이 필요했기에 동네 큰 공터나 동네에서 유일하게 큰 마당이 있던 무당집 마루에서 보따리를 풀곤 했었지요.
보따리장수가 오기로 예정된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막상 화장품을 사려하면 선뜻 사지 못하고 집었다 놨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고민고민하다가 큰마음먹고 하나 구입하시곤 했지요.
마음에 드는 루주를 손에 넣은 날은 그리 좋아 싱글벙글 웃는 엄마의 모습이 좋았기에 저도 은근히 보따리장수를 기다리고는 했답니다.
보따리장수가 또 우리 동네에 떴습니다. 신기하고 재미난 보따리 속 물건들을 구경하고 싶어 엄마 치맛자락 잡고 따라갔지요. 보따리장수가 펼쳐놓은 물건 중에 이번에는 여자아이들의 형형색색 원피스를 가득 담아 왔습니다. 새 옷을 입는 날은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에나 가능했지요.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보따리장수가 풀어놓은 옷 구경은 우리에겐 더없는 놀이가 되고 신비로운 신세계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옷 중에 하늘하늘한 분홍색 원피스가 첫눈에 꽂힙니다. 분홍 원피스에 반해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만지작거렸지요. 아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보따리장수는 그러지 말고 일단 입어보라 권합니다.
탐나는 예쁜 분홍원피스에 마음을 빼앗겨, 입어보고 싶은 마음에 엄마를 한번 쓱 보았지요.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한번 입어보라 합니다. 입어보라는 말 한마디에도 콩닥콩닥 심장이 뛰고 설레는 마음 가득 이었지요.
분위기를 보더니 옆에 함께 있던 동생도 눈치껏 초록색 원피스를 집어 들며 "엄마 나도 입을래요" 합니다.
하늘하늘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날아갈 듯이 좋아하는 딸들을 보며 어쩐 일인지 엄마가 선뜻 옷을 사주셨지요.
명절에만 가끔씩 새 옷을 입곤 했던 우리에게 아무 날도 아닌 그냥 평범한 날에 그것도 너무 예쁜 원피스를 선뜻 사주신 엄마를 보며 얼떨떨합니다.
집에 와서도 부드러운 촉감에 분홍원피스가 너무 예뻐서 거울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지요. 일 년에 한두 번 구입했던 엄마의 루주는 그때는 그렇게 포기하고 딸들의 원피스를 사주신겁니다.
그 후론 저는 그 원피스가 애착원피스가 되었습니다. 아까워서 편히 입지도 못하고 고이고이 접어두고 특별한 날만 꺼내 입곤 했었지요. 동네 골목대장으로 학교만 갔다 오면 가방 던져놓고 해저물때까지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던 저는 원피스 입은 날은 이상하리 만치 행동도 얌전하게 되는 겁니다.
분홍원피스가 생긴 날부터 제가 애정하는 색깔은 단연 분홍색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파란색을 좋아했던 저였지만 그날 이후론 무조건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갑작스럽게 불주사를 시행하게 됩니다. 아마도 결핵 예방주사였던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시행된 주사였기에 마음의 안정이 안 되었지요. 더군다나 주삿바늘에 불을 붙여 맞는 불주사라고 하는 소문에 아이들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동사무소에서 직접 아이들을 불러 모아 설명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불주사는 불을 붙여서 맞는 게 아니라 주삿바늘 하나로 여러 사람이 맞게 되기에 혹시 모를 감염 예방 차원으로 소독하는 것이다.” 알코올을 가열해 바늘을 소독하기에 불주사라고 했을 뿐 실제로 불을 붙여 주사 맞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했었지요.
다만 주의 사항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다른 주사와는 달리 주사 맞고 일주일 후 정도엔 딱지가 앉게 되는데 딱지를 억지로 떼면 안 되며 자연스럽게 떨어지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안심하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셨으나 주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진정이 안됩니다. 마음에 힘을 얻고자 분홍원피스를 챙겨 입고 주사를 맞기로 했지요. 신기하게도 성공입니다. 아끼고 좋아하는 옷을 입으니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무사히 주사를 맞았고 시간이 흘러 마침 딱지가 잘 앉은 상태였지요. 주사를 맞은 날부터 저는 분홍원피스를 즐겨 입었습니다. 기분 탓인지 분홍원피스 입은 날은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고 마음의 위안이 되곤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그날도 바로 제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던 날이었지요.
여느 때처럼 학교 갔다 와서 가방 던져놓고 나가 놀려던 저를 엄마가 붙잡습니다. 가게 청소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도망가려는데 엄마가 저의 어깨를 잡았고 엄마 손을 피하던 찰나 주사로 생긴 딱지가 엄마의 손끝을 지나며 야속하게 훌렁 떨어지고 맙니다.
순간 너무 아파 아!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감싸 쥐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딱지가 떼어졌던 것이죠. 너무 아팠습니다. 그 아끼고 아끼던 하늘하늘 원피스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딱지가 떨어져 아픈 것보다 피로 물든 원피스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서러운 마음이 극에 달 했지요.
저에게 있어 분홍원피스가 얼마나 소중한 원피스인지 엄마도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 미안해하며 안절부절못했지요. 좀처럼 엄마에게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았던 저였지만 그때만큼은 엄마가 그리 미울 수가 없더군요.
억지로 떼어진 딱지로 인해 그 자리가 덧이 나서 낫기까지도 많은 날을 고생했고 결국은 커다란 흉터로 남았습니다. 그 어깨 흉터를 볼 때마다 분홍색 원피스가 떠오르곤 했지요.
온통 마음을 설레게 했던 몽글몽글 추억의 분홍빛 원피스는 오랜 시간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