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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ny Dec 04. 2021

소원을 이루어드립니다.

낙산사에서


대학시절 먼 지역에서 상경하여 서울에 올라온 친구들을 보며 가끔 말 못 하는 부러운 점이 있었다. 그들은 빡빡한 서울살이에 지쳐 배터리가 방전될 즈음 "요양"이라는 이름하에 본가로 돌아가 가족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활력을 가득 채워 돌아오곤 했다. 배부른 소리지만 나에게 서울이 아닌 곳에 돌아갈 집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아는 이 하나 없는 어디론가로 떠나 며칠을 보내며 혼자만의 혹은 그곳에서의 우연한 인연들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 나에게 여행지를 선택할 때 [산]과 [바다] 중 한 가지를 골라야 하는 것은 마치 매트릭스에서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고르는 정도의 무게감을 가지는 일생일대의 선택이었다. 사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체적으로 동해바다로 떠나기로 하고는 이 어려운 의사결정을 줄곧 회피하곤 했다. 왜냐하면 영동지방은 지역적 특성상 설악산을 등지고 동해바다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산과 바다를 모두 좋아하는 내 취향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훌륭한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강원도가 산과 바다를 모두 품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고향이 강원도이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성묘를 가거나, 아버지의 친구친척들을 뵈러 어렸을 때 늘 가던 곳이었던지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서 그랬었는지 지금도 그 마음의 거리는 어른이 되고도 꾸준하게 유지가 되었고 여행을 갈 때면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강릉이나 속초, 동해로 떠나곤 했다.




이번에도 버릇처럼 무작정 강릉에 다녀왔다. 강릉에 가면 꼭 낙산사를 가곤 하는데, 끊임없는 도시의 소음에 지쳐서일까 어디가 끝인지 예상하기 어려운 그 깊고 푸른 바다와 고즈넉한 사찰이 공존하는 이곳은 나에게 묘한 포근함을 준다. 얼마 전부터는 소원지를 작성하여 절 곳곳에 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었는데 그곳에서 바다보다도 깊고 햇살보다도 따스한 한 소원을 만났다.




부끄러워졌다. 소원지 가득 나와 내 가족의 부와 명예, 건강과 성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빽빽하게 적은 뒤 걸어놓으면서 의기양양하게 꼭 성공해야지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엄청나게 초라해졌다. 이 종이 한 장으로 인해 아직도 누군가는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고, 덕분에 세상좀 더 행복해질 수 있고 더 좋은 세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온갖 좋은 것들이 가득한 서울에서의 찬란한 삶은 들여다보면 팍팍하고 계절에 관계없이 차갑고 시리다. 하지만 그런 차가움을 만드는 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조금 더 있다면 이 도시의 온도가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재충전을 위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백예린 - 지켜줄게

https://youtu.be/IDD5_z3kK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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