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1
11년 전, 2012년 3월 프랑스 파리.
낭만의 도시라 불리지만 나에겐 낙담의 도시였던 곳
중학교 화학 시간 이후 처음 맡은 골아터진 암모니아 냄새의 지하철.
바나나를 먹고 있던 내게 자신의 그것(?)을 만지며 네 입에 있는 것과 내 것이 같다고 말하던 변태.
캐리어와 배낭을 꾸역꾸역 짊어지고 탄 에스컬레이터 정지버튼을 눌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소매치기
루브르 박물관 앞에 종이를 들고 '사인 플리즈'하며 고사리 같은 손을 내 주머니에 넣던 앵벌이 꼬마들.
돈을 주고 가라고 해도 다시는 안 간다고 했던 그곳에 2023년 10월, 11년 만에 돌아갔다.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aka.PTSD)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PTSD로 인해 가방을 세게 움켜잡고 고개를 1초 단위로 좌, 우, 그리고 180도 뒤로 홱 돌려가며 주위를 더욱 경계했다. 멀리서 보면 내 머리가 360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경비 아낀다고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던 파리 지하철을 26인치 캐리어를 끌고 낑낑 올라갔었다. 그러다 소매치기도 만나고 인종차별도 당하고고생도 더없이 했기에 주저 없이 핸드폰을 열어 택시를 불렀다.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길 모퉁이 벽에 딱 붙어 서서, 친구를 보초 세워두고, 손목에 딱 맞게 끼워 넣은 핸드폰 스트랩 끈을 더욱 바짝 조이며.
첫 번째 기사가 운행을 거절했다. 두 번째 기사도. 세번째, 네 번째... 점점 마음이 초조해진다. 초겨울이라 빨리 진 해 때문에 어두컴컴해진 거리.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속과 같으리라.
구세주 같은 열여섯 번째 기사님이 수락해 준 덕분에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했다. 낯선 잠자리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날 가이드 투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2년 3월, 20대 중반, 어려서 여행에 촌스러웠던 나는 용암보다 더 뜨겁게 끓어 넘치는 자심감에 이런 망언을 뱉었다.
"가이드 투어 같은 걸 왜 해? 자유 여행이 왜 자유인데. 다 내가 스스로 할 거야."
그렇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을 못하고 쏘다니다 위에 같은 일을 연속 콤보로 얻어맞았지.
2023년 10월, 30대 중반, 좋게 말하면 여유가 있어지고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가 된 나는 결심했다.
"여행 첫날 그 도시의 가이드 투어를 들으면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역사, 미술, 인문학적으로 소양도 쌓을 수 있어. 그리고... 가이드 언니 뒤에 숨을 수 있어." 가이드 투어를 신청한 가장 큰 이유는 단언컨대 맨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정말 내 몸을 물리적으로 그분들에게 숨긴다는 게 아니고 현지 경험이 많은 이들의 눈을 빌려 소매치기를 구분하고자 함이었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이름이 똑같던 가이드님과 함께 샹젤리제, 개선문, 몽마르트, 사랑해 벽, 에펠탑등 유명 관광지를 포함하여 무려 10시간이 넘는 투어를 했다.
(가이드님 덕분에 매우 안전했다.)
화려한 장식, 눈부신 조명, 광기 어리도록 섬세한 조각, 그곳에 담긴 유구한 역사등
가히 감탄이 절로 나와야 했다. 하지만 내 입에선 단 한 번도 "우와~"가 나오질 않았다.
이상했다. 아무리 11년 전에 한 번 봤다고 해도 아주 잠시 딱 한 번 본 것 아니던가. 그렇게 기대를 가지고 오랜만에 돌아왔건만... 감탄스럽지가 않았다. 놀랍지도 경이롭지도 압도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영혼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무렵 가이드님이 작고 초라한 집 앞에 멈추더니 수잔 발라동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제분업자 작업실, 장례식 화환 제조 공장, 야채 판매, 웨이트리스, 서커스 곡예사등 안 해본일이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아온 그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몽마르트 화가들의 뮤즈로 불린다.
4년간 그녀의 연인이었던 르누아르가 그린 수잔 발라동. 아름다운 얼굴, 고운 피부, 풍만한 몸매 그야말로 많은 남자들의 뮤즈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역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툴르즈 로트렉이 그린 '숙취'라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흐트러진 머리, 몸매가 부각되지 않는 실루엣, 고집스럽고 날카로워 보이는 눈썹과 콧날, 짜증이 한껏 묻어나는 그림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그린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과장되게 비대해진 턱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더욱 강조했다.
다른 화가들이 자신을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도 자신은 자신의 얼굴을 삐뚤게 그려냈다. 결국 그녀가 원한 것은 아름다운 여자로만 남는 게 아니라, 화가 '수잔 발라동'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내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그렇게 그린 것이 격하게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내가 원하는 삶과 너무나도 닮았기에.
아름답고 사랑받는 한 여자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고 작가 '최소망'으로 기억되고 싶다.
가난해도, 배우지 않았어도, 모욕과 무시에도 굴하지 않고 화가로서, '수잔 발라동' 자기 자신으로서 삶을 살아낸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이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에 빼곡히 새겨진 조각처럼 내 마음에 새겨본다.
11년 전의 나처럼 '우와~'하는 풋풋함은 없어졌지만, 한 예술가의 삶과 사랑 꿈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이해하는 그런 '아~'가 생겼다. 프랑스 파리 1일 차, 나는 조금 달라져 더욱 풍성해진 여행을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