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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Dec 07. 2023

당신의 삶이 파티에 뿌려질 색종이 같길.

#파리 2

2023년 10월 10일, 파리에서 둘째 날.

나는 'Porchefontaine'이라는 작은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는 중이었다. 파리 외곽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과 도심 사이에 있는 작은 기차역이라 관광객이 없는 곳이다. 때문에 나를 흘끔흘끔 보는 파리지앵들의 시선을 피해 조금 더 벽 쪽으로 몸을 숨긴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 스쳐 지나가는 배경중 하나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1번 플랫폼으로 들어온 'Musee d'Orsay'역으로 향하는 기차의 몸을 실어본다. 조금은 어두운 객실 안, 뜨문뜨문 떨어져 앉은 사람들, 내 뒤를 따라 열차에 올라탄 여자분에게 먼저 가라고 길을 터주니 '메르시' 하며 웃어 보인다. 나도 웃음으로 답했다. 소매치기가 많이 없는 지역이 아닐까? 긴장이 느슨해진 나는 카라비너로 입구를 봉쇄해 놓은 핸드백을 열어 에어팟을 꺼냈다. 나는 드라마 OST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의 드라마 내용을 곱씹어 떠올려보기도 좋고,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꼬리를 잡고 늘어져 온갖 상상을 펼치기도 좋으며, 경험한 일뿐 아니라 경험해보지 않은 온갖 감정까지 끌어다 웃고 울기도 좋아서다.

파리하면 떠오르는 그 드라마의 OST를 재생하고 창 밖을 바라본다. 그렇게 40분여간을 위에 나열한 3상(회상, 상상, 공상)을 즐기다보니 어느새 오르쉐 미술관역에 도착했다.


2012년 3월 16일,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는 프랑스 파리의 오르쉐 미술관이구나. 유명하다고 해서 일단 오긴 왔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사진이나 찍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아 옛날에 학교에서 배운 거 같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그래 저것도 책에서 본적 있어. 그림, 그림, 그림, 조각, 조각, 조각 아 기 빨려. 오디오 가이드는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다리도 아프네. 아직 1층밖에 안 봤는데 5층까지 있다고? 하.. 그냥 나갈까? 아니야 입장료가 얼만데. 참아. 뽕은 빼야지. 저기 중앙에 벤치가 있네. 좀만 앉아 있을까? 앉아서 핸드폰 보다 보니 한 시간이나 지났네? 이럴 바엔 그냥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람들이 왜 여길 추천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냥 나처럼 미술 모르는 사람한테는 기만 빨려. 다음엔 오지 말아야지.


2023년 10월 10일

"Bonjour. Un ticket, S'il vous plaît." 

11년 만에 돌아온 오르쉐 미술관, 서툰 불어로 티켓 한 장을 구매한다. 예전에 미쳐 못 가본 5층으로 향했다.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라 불리는 마네, 모네, 드가, 모르조,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감사하고, 이런 거장들의 그림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화가 모네의 그림들은 내가 느끼기엔 조금 흐리멍덩한 기분이었다.

클로드 모네 빅벤 1871 /양귀비 들판 1873 /수련연못 1919

그의 그림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흐릿하고 형태를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화가이고 인상주의 미술의 한 획을 그은 예술가였지만 그의 그림은 영 내 취향에 맞지 않다고 느끼던 그때 또 다른 모네의 그림 앞에 서게 되었다.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1892-1893

이 작품은 앞선 세 작품보다도 훨씬 더 사진과 실물이 달랐다. 사진이 훨씬 선명하고 또렷하다.

실물은 정말 저게 뭔가 싶을 정도로 흐릿하고 불분명하고 어수선하다.

그때 귀에 꽂고 있던 오디오 가이드에서 성우의 말이 흘러나왔다. 모네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매일같이 성당 앞 같은 자리에 앉아 시간별로 빛이 바뀌는 걸 확인하며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그림 안엔 빛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 보기보단 노력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네 하고 넘기려는데 오디오 가이드가 말을 이어간다. 그림이 흐릿하고 불문명하게 표현된 것이 마치 기억에 한편을 끄집어낸 거 같은 느낌이라고. 끊어졌던 퓨즈가 연결되듯 왜 저렇게 그릴까라며 단절되었던 나의 뇌신경 두 개가 연결된 느낌이 들며 전구가 켜졌다. 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림이라는 건 현재만 담는 그릇이 아니구나. 과거의 기억 한편을 꺼내어 놓을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그때부터였다. 그림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았던 선이 보이고 윤곽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생동감이 넘쳤고 감정이 액자 밖으로 흘러나왔다.

화가의 기억 한편을 허락하에 엿보며, 작가의 흐릿해진 기억은 감상자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쾌감.그림이란 이런 것이구나.


인상주의 그림은 보는 상황, 색, 빛에 따라 다 다르다던데 카메라로 찍었을 때도 달라지는 상황까지 고려된 거라면 도대체 화가들은 몇 수 앞을 내다본 예술을 한 것인가. 인상주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 정답이 없는 문제 같아서. 결말이 열린 소설 같아서. 답을 정해 놓지 않고 감상자가 정답을, 결말을, 흐릿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OST 같아서.


모네를 포함한 인상주의 거장들의 그림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지만 단번에 내 눈을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으니 바로 폴 시냐크의 '아비뇽의 교황청'이란 작품이었다.

폴 시냐크/ 아비뇽의 교황청 1990

점묘법(모자이크)을 사용한 그의 그림의 색감이 아름다웠다. 비슷한 계열의 색을 중복이나 지루함 없이 다채롭게 뽑아낸다. 멀리서 보면 색이 합쳐지는 기법이 맘에 든다. 마치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인생관과 비슷하달까?

내 삶도 저렇게 화사한 색감이었으면.

비슷하지만 다채로운 사람들과 좋은 예술적 영감과 지식들을 나누었으면.

그래서 멀리서 바라봤을 때 나의 삶이 합쳐진 색처럼 조화로웠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고갱은 그의 그림을 보고 '축하 파티의 뿌릴 색종이 같은 그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혹평했지만 나는 나의 삶이 파티의 뿌릴 색종이 같았으면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기뻐하는 순간, 누군가를 축하하고 축하받는 파티에서 가장 아름답게 게다가 가장 클라이맥스가 되는 순간에 뿌려지는 것이 색종이라면 그것만큼 아름답고 특별한 존재가 있을까 싶다.


나와 당신의 삶이 순간순간 아름답고 특별하길, 먼 훗날 우리의 삶이란 파티를 돌아봤을 때 뿌려진 수만 개 색종이들의 색이 합쳐져 조화롭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폴 시냐크  우물가의 여인들1892 / 양산을 든 여인 1893 /초록색 돛, 베네치아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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