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경고
세상이 왜 이리 각박한지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자본주의의 문제인 것 같다. 아니면 자본주의 시대에서 정직함보다, 양심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문제인가. 선후를 알 수 없는 모순들이 팽배하다 못해 콸콸 세상으로 흘러 가니 강물이 바다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모순들이 자본을 향해 흐르는 것만 같아서 속이 상한다. 내가 상하는 것은 인류를 위한 공리 탓이 아닐까. 공리주의자 만세.
제목을 잘 지었는가를 알 수가 없고 나 또한 그 일원이거나 일원이었다. 그럼에도 정말 아니다 싶은 것들을 매일매일 적어야겠다. 일종의 내부고발이요. 일종의 사실적시인데, 공리주의자의 입장에선 내 일 아니라고 입 꼭 다물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비정해서 싫다. 나아가 밉다. 되짚어보면 아무도 저항하지 않아서 의아하다. 마흔이 되어가면서 진짜로 불혹에 대해서 많이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어떤 것들이 내 안에 자리 잡아서 적혀 나온다.
건강에 많이 신경 쓰는 편이다. 어릴 적 사고로 죽을뻔했다. 내 두개골이 갈라져, 뇌가 보일 지경으로 의식도 없이 응급실에 실려가 한 달여 남짓, 식물인간으로 살았고 기적적으로 정신을 채렸다(고 들었다.) 내가 낭비한 것들에 대해 매일 아쉽고 안타깝지만, 후회만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받아들이고 그마만큼 더 관리를 한다.
건강에 대해 안다는 것은 많이 공부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공부할수록 배우는 것들이 있다. 그래, 배워서 알게 되는 것들에 감사하고, 감사를 넘어 사랑하기도 한다. 그렇게 알게 된 일부를 공유할까 한다.
아스파탐, 수크랄로스 등의 인공감미료는 해롭다. 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해롭다. 너네 인류가 ‘자연을 지배했다’고 판단할 여지는 많은데, 유기체의 삶의 방식들은 다종다양해서 끝날 때까진 끝난 것이 아니다. 화산이나 핵전쟁으로 핵겨울이, 빙하기가 온다면 살아남는 종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볼 노릇이다. 대지진이나 홍수가 와도 그렇겠지.
계속 잡설이 길다. 이것이 나와 내 글의 한계이기도 하다. 상술한 사고 이후로 HSP가 된 것을 스스로 거의 확신하고, 내가 알고 느끼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느끼거나 알지 못해 대화가 안 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언제나 부연을, 주제의 본류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거나 그 방향으로‘도’ 나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기에 그렇다.
다시, 인공감미료는 해롭다. 대 AI시대에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사실 맘 같아선 그래, 어차피 업데이트할 ‘자아‘인데 꼭 알아야 하나? 검색해야 하나? 를 생각하지만 적어도 사용하는 동안에는 메인터넌스(관리술)를 해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유효했다.
그래, 인공감미료가 왜 해로운가. 단순히 ’맛‘을 제외한 작용기전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해롭지 않다는 측의 주장은 주로 ADI가 설정되어 있으니 그 안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해롭지 않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ADI를 채우기 위해선 코끼리의 몸무게를 측량할 때에나 쓸 법한 단위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산업의 폐해다. 저탄고지 키토, 방탄커피를 7년 넘게 해 왔다. 몸이 가는 것이 느껴지고, 심장에 통증이 있어서 뭔가 잘못되었다.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두 번이나 당해본 입장에서 부당해고가 주는 스트레스, 그즈음에 맞물려 결혼이라든가, 후술 할 무고한 고소를 숱하게 당하며 믿지도 않는 삼재 같은 것을 ’믿고 싶어‘지더라. 삼재도 아닌데 이렇게 힘들면, 아니 이 정도 까지라면 삶이 과연 살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반성을 했다.
저탄고지가 주는 폐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7년 넘는 시간 동안 저탄고지를 했다는 것은 내가 패스트 펭귄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대한민국에서 유기농 기버터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부터 최선을 다해서 방탄커피를 만들어, 사마시며 또 보고 느꼈다.
인공감미료는, 해롭다. 물론 설탕이라고 이로운 것은 아니다. 생각건대 일정 이상의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이롭지 않아서 이런 것들만 멀리하고 살아도 명징한 정신과 ’나름‘ 깨끗한 육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것들은 ’산업‘ 안에서 작동한다. 어떤 이가 최초의 움직임으로 뛰어들어 회사를 세워 이윤을 내면 후속, 후발주자들이 덩달아 뛰어들어 경쟁구도를 가진다. 그러나 모두가 먹고살 만큼의 파이가 확립된 ’산업‘에서는 그로 먹고 사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모두가 쉬쉬하거나 내부의 불콰한 정보가 밖으로 잘 새어나가지 않는 것인가.
거듭 해롭다고 말은 하면서 왜 해로운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마만큼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과거, 건강기능식품에 대장의 장내 유익균총을 위한 식품에서 전혀 쓸 필요가 없는 수크랄로스를 쓰는 이유에 대해 지적했고 구매 전에 이러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환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를 토대로 사실을 적시하는 댓글을 적었는데, 고소를 당했다. 죄명은 사실적시,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모욕죄 등이었는데 이를 통해 개인적으론 사법개혁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섯 시간은 떠들 수 있다.
사실적시와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는 것이 문제다. ’ 네가 한 말이 사실이어도 우리의 명예가 훼손되고 거짓말이어도 우리의 명예가 훼손된다.‘ 라는 상대측의 주장이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이런 이유라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괴롭힐 수 있지 않은가? 2년이 넘도록 이러한 재판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1심, 2심 모두 무죄로 확정문서까지 받고 났지만, 무고의 죄명으로 고소를 진행하자니 쉽지 않다.
다시, 인공감미료는 해롭다. ADI가 설정된 것과는 별개로 해롭다. 현대 산업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이 기준이 된다. 수크랄로스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측의 논리를 보면 기가 찬다. 그러나 수크랄로스의 기원에 대해 알면 이건 반박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법정에서 쓴 논리를 공유한다.
수크랄로스는 살충제의 일종으로 개발된 물질이라고 알고 있다. 분자구조조차 그와 유사한데, 책임자가 ’테스트 해보라’ 라고 적은 쪽지를 어떤 바보가 ‘맛을 보라’ 라고 읽어서 그 단맛을 알게 되고 감미료로 사용된 케이스, 그러나 오십 년쯤 전에 승인된 물질에 대해서 설정된 ADI가 현재에도 유지될 수 있겠는가? 자그마치 10년 전 핸드폰도 못 쓰는데?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짚은 것도 그것이다. DDT를, 처음에 항공에서 살포할 때에는 인간에게는 ‘해롭지 않다’였다. 그러나 그를 믿고 눈처럼 맞으며 돌아다닌 사람들의 고엽제 증후군에 대해서 아무리 많고 적절한 보상이라도 그의 비참함을 덜어줄 순 없다.
마찬가지다. 농약에도 ADI가 설정되어 있다. 농약이 없으면 농사를 짓기가 어려운 광활한 농토에서 산업화된 농업도 문제다. 아무리 잘 씻어도 남아 입에 넣을 수밖에 없는 ‘잔류농약’에 대한 기준이 생겨 그렇다. 그래, 그러면 ADI안에서 농약을 매일 조금씩 먹어도 ‘안전한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 저 ADI라는 수치가 문제다. 그 수치에서 명확한 안전기준이라는 것이 되려 더 좋은 알람인데 그를 자의적으로, 혹은 왜곡해서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한다. 아스파탐은 2급 발암물질로 지정되었는데도 ADI가 변동되지 않았다. 그러면 ADI 안에서는 안전하다.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ADI가 설정된 것들은 반드시 유해하니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로 읽어야 한다. 누가 ADI이내의 농약을 매일 퍼먹겠는가.
ADI, 즉 ‘당장 발현되지 않는 안전마진’이라고 읽는 것이 맞다.
여기에서는 또 의료산업이 문제다. 아파도 쉽사리 죽지 않는다. 연명치료는 무섭다. 사람이 제기능을 다할 수 없이 쇠락하거나 고통이 선을 넘어 실익이 없는데도 의료보험체계나 돈벌이를 위해 산업이 제멋대로 구른다. 물론 정말로 코마까지 갔다가 살아온 내가 반대를 적으니 우스꽝스럽지만 어쩌겠는가. 하지만 모두가 연명치료의 피해자고 의료‘산업’의 제물이다. 아픈 데에는 장사가 없다.
불효의 문제가 되고 비정함의 문제가 되는데 이는 마케팅이나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 아프게 방치할 것이 아니라 관리를 해주고 막아줘야 한다. 핵가족화가 문제다. 문제는 도처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우리는 문제와 같이, 문제를 안고 업고 산다.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건강이 적당히 파괴되어도 인간은 쉽사리 죽지 않는 대형동물이다. 장내유익균총이 파괴되거나 뇌 반구 하나가 파괴되어도 ‘주민등록번호’ 상으로 생존할 수 있고 그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나 보험사의 지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적당한 치료로 상태를 유지하면서 누군가에겐 또 하나의 돈줄이 될 수 있다. 이 생명에 대한 경시가 무섭다. 너무 만연해서, 당연해서 더 무섭다.
반려동물을 키우는가? 양치는 매일 시키시는가? 츄르는 이에 해롭다. 애초에 우리 사는 세상에서 ‘습식의 간식’은 거진 꿀밖에 없을 것 같은데, 여하튼 그 맛만 있고 불콰한, 돈을 주고 사 먹이는 간식이 반려동물의 치아 건강에는 치명적이다. 그러나 ‘좋아하니까’ 사 먹인다. 양치를 시키지 않는다면 언젠가 전발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또 말랑한 사료 회사가 돈을 벌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모든 것과 곳에서 이런 양상이 펼쳐진다. 휴먼그레이드는 사실 해당이 안 된다. 우리가 그들보다 강하고 해로움을 더 잘 견딘다. 우리의 기준을 갖다 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비대한 자아는 또 왜곡해서 해석한다. 산업은 도처에 자리를 잡고 혀를 날름 대며 불쾌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우리를 유혹한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산업이라는 범주들에 대해서는 결코 사랑할 수가 없다. 가해지는 위해를 무시하고 당장에 도출되는 결과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얄팍한 것들을 포용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말해야 하고 말해봐야 아무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누군가는 꾸준히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공장에서 나온 것들을 섭취하지 말라.
순간의 위안과 편의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미래의 비참함을 담보로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얄팍한 쾌락을 단호히 거부하라.
물론 어떻게 내가 당신을 막을 수 있겠는가. 다만 당신이 이 글을 읽었다면, 당신은 멈출 수 있었다. 나는 그 정도면 내 몫을 다했다고 자위할 것이다. 슬픈 아침이다. 글도 생각도 정리되지 않아서 더 슬프다. 며칠 전에 퍼뜩 깨달은 유한함에 대한, 유기체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이 나를 추동한다. 영원히 살 수 없다는 통렬한 인지가 내 손을 멋대로 움직이는 듯하다.
나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