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아내와 등산을 갔다. 가서 오래 걷고 많이 얘기했다. 아내의 피셜로는 우리는 최초로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등산을 다녀왔다고 했다. 놀랍다. 여태까지 논쟁이 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게 싸움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듯하다. 와이프의 개념과 나의 개념 사이에는 멀고 오랜 격차가 있었다. 이를 통해 깨닫는다. 어떤 것들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결코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 적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해 끊임없이 적는 나날들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을 어떻게 당신께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당신의 인식이라는 요원한 공간을 그리고 갈구하며 산다. 그렇게 살아서 제대로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살아 숨 쉬는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 그래서 글이 줄곧 멈춘 것이다. 얼핏, 대강 쓰는데, 퇴고할 수 없는 글들이 나왔다. 애초에 고칠 가치가 없는 글이라. 그런 것들을 배설해서 귀한 시간을 낭비하거나 티끌만치일 망정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적는다. 고독에 대해서, 적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모친의 두개골 위로 혹이 볼록 솟아오른 것을 처음 보았다. 그 모습에 참 많이 놀랐다. 브런치에 호언하며 적었던 글들과는 다르게 금세 마음이 약해졌고, 이미 너무 늦어버린, 고통 없는 임종을 기원하고 또 당부했다. 심지어 등산 다녀와서 밥은 먹으러 부처님 사리 있는 절에 가서도 울 어매 덜 아프게 하소 합장 한 번 한다는 것을 배고픔 삼켜지듯 삼킨 자신이 미웠다.
함께 온 아내가, 며칠 전의 스쾉으로 인한 대둔근 데미지가 있는 상태에서 꽁꽁 언 손을 맞잡으며 드디어 한 번의 다툼도 없이 등산을 마친 아내가 말했다. 당신 글에서나 봄 직한, 어머니의 생신에 대해 진심으로 우러나 적던 어린 소년을 본 듯하다고. 그래, 맞다.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스트레스가 암의 주요 원인이라는데 그 스트레스를 가중하던 지난날의 모든 나들과 함께 미안하다.
용기를 내어 모친의 손을 잡았다. 아프지 마시라. 그러나 얼마간 남은 멀쩡한 정신을 배웅해야 하는 길을 안다. 그를 위임하거나 대신할 사람도 없다. 외동이라 그렇다. 귀하게 자라긴커녕 모친으로부터 문자 그대로 생존, 그러니까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이라 그렇다. 이런 것들을 누군가에게 말하려면, 고백하려면 전후사정을 몽창 말해야 할 터인데, 그를 들어줄 한가한 사람도, 또 이해해 줄 따뜻한 사람도 없는 지난 삶이 얼마나 외로웠는가.
고독, 항아리 안에 독충을 가득 풀어놓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단 한마리. 그걸 어떻게 하더라? 심지어는 그게 이 개념이 맞는지도 가물한데, 그렇게 살아남은 그 독충은 외로울까? 기쁠까? 허망할까? 어떨까? 그래서 사르트르가 좋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허나 단언컨대 확실히, 분명히, 자세히 알더라도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도 있다.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혹은 다른 이유로라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영역이 있다는 얘기다.
어찌 되었건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라, 모친이 먹고 싶다시는 음식들을 사다 바쳤다. 미움보다 혈연이 도리가 먼저일 수 있던 것은 어찌 되었건 어디서건 제 할 몫은 완벽히 해내고 나서, 그러고 나서야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권리와 의무에 관한 경험칙을 체득한 때문이리라. 마음이 복잡하다. 명상록을 매일 읽고 싶다. 일종의 루틴으로 만들어야겠다. 뱃속이 스트레스로 부글부글 끓는다. 짜증을 내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과일식을 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몸이 알고 머리가 아는데 혀 끝의 말초한 신경들이 나를 움직인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이 부조리를 못 견뎌 죽은 사람이 까뮈인가 카프카인가.
불혹이 다가오면 좀 더 행복할까? 그 어떤 충동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옳은 것들을 추구할 수 있을까? 마흔이 되어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고, 주변에 마흔이 넘어간 사람들의 삶이나 그 궤적을 추적해 본들 또한 모를 일이다. 세상의 불공평과 부조리는 그를 일찌감치 발견하고 지적하는 사람에게 이를 드러내는 까닭이다. 불혹 즈음에는 저 드러난 이가 미소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찢어 발기기 위한 것인지 알 것도 같다.
어렵지 않게 사간 음식을 모친은 간신히 씹어 삼킨다. 소변줄을 차고, 산소관을 연결한 상태에서 비닐장갑을 끼고 날라다 입에 넣는다. 그래서 우리 서로의 짐이 덜어질까? 혹은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임종 후에 뒤늦은 효자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서 기억을 살핀다.
어렸을 적, 숙모가 판매하던 전래동화 40권을 사다가 책장에 꽂아 놓았는데, 그걸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엄마는 그게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했고 다시 읽으라고 했다. 겨우 40페이지 남짓한 동화를 왜 다시 읽는단 말인가? 그러나 ’말 안듣는 청개구리‘는 다시 읽었었다. 처음에도 읽고 울면서 엄마 말 잘들을께 하며 안겨 울다가, 그 말 안 듣는 청개구리 놈이 엄마 아픈데도 천방지축 놀러 다니다가 결국 엄마 죽고서야 효자가 되어 엄마가 반대로 하겠거니 하고 남긴 유언에 따라 하천 제방 둑 안에 묻어서, 비가 올 때마다 엄마의 시신이 불어난 물살에 휩쓸려 유실될까 울며 땅을 치며 통곡한다는 얘기.
그래, 난 그런 속상할 미래를 미리 알고 그렇게 섧게 울었을까? 아니면 죽는 순간까지 한 번도 이해받지 못한 불효자의 원통함을 알고 섧게 울었을까? 아직도,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서러운 기억 안에서 동화책 속 무덤처럼 볼록 솟은 엄마의 두개골이 무서워서 무너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저 오랜 적이 무너지고 나면, 열릴 장독 밖에서 난 무엇을 할까.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