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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미러 감상문 , 1화 공주와 돼지

시즌 1-1화

by 빛나길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일까? 어디서부터고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스포가 되지 않을 만큼 유명한 드라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리라 믿어마지 않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스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익명의 괴한이 영국의 공주를 납치한다. 석방 조건은 딱 하난데, 영국의 총리가 생방송으로 돼지와 성관계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언론을 통제하고, 이를 부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다가올수록, 상황이 급변하는데, 일테면 공주의 것으로 보여지는 손가락을 방송사에 보낸다.


영국 왕실은 총리를 채근하고, 당장 공주의 손가락이 배달된 사실을 접한 청중들은 총리의 존엄을 희생하기로 한다. 반면, 총리는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고, 범인이 숨어있을 만한 곳으로 병력을 보내 정찰을 통한 감시, 대기를 명령한다.


총리실서 정보가 새어 나간다. 총리실의 직원과 기자 사이의 은밀한, 섹슈얼한 거래가 오가고 새어나간 정보로 기자 또한 범인이 숨어있는 곳으로 특정된 곳으로 휴대폰을 들고 방송을 촬영한다. 그 즈음, 총리는 마음이 급해져 습격을 지시하고 디코이를 발견, 좌절한다. 그러나 문 밖의 인기척에 경찰병력이 용의자인 줄 알고 기자를 쏘고, 기자의 핸드폰을 부순다.


시간이 도래해 총리는 돼지와 성관계를 하고 그 순간은 전국민에게 방영된다. 채널을 돌리려는 여자에게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남자가 제지하고 ‘이 순간은 역사적인 것이야’ 라고 말한다.


과연 역사적인 순간이다. 인류가, 대영제국의 드높은 콧날이, 존엄이 짓밟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면 자살을 할 망정, 돼지와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 높은 자리에 있다면, 자리 보전을 위한 욕심이 그득 차오르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 돼지와 성관계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버리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런 일들의 범주는 많지 않은데, 반대로 성관계를 한 후에도 과연 그가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절대로. 단언하건대 그가 무슨 행동을 하던 ’돼지와 성관계한 남자‘로 낙인찍힐 것이며 그를 아는 온 인류가 그를 죽을 때까지 물어뜯을 것이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반면, 그가 거부하면 그 또한 총리직에서 내쫓길 것이다. 하지만 한명의 목숨보다 인간의 존엄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노예, 투표권, 성평등, 그 수많은 갈래들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서, 혹은 신장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렸던가. 그를 추동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총리직에 대한 욕심? 아니면 얼굴도 모르는 국민들이 내리누르는 압력?


인간의 존엄은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획득한 것을 지키는 것 또한 자기 안의 삶에 국한된다. 이는 이전에 쓴 글 ’삶의 격‘에 있으니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이틀 전, 아내와 등산을 가서 한 대화를 인용한다. 우리는 고양이들을 키우는데 아주 귀엽고 사랑스런 녀석들이다. 나아가 피치못할 사정, A.K.A여행 등으로 인한 우리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홈캠을 설치하고 자동급식기와 급수기, 자동화장실을 설치하자는 데에 이른다. 그러나 그런 홈캠이 얼마나 해킹을 잘 당하는지, 보안이 취약한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름에 속옷차림으로 자유분방하게 샤워실에 뛰어가는 나의 발랄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게 될까 걱정한다.


물었다. 왜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물론 사생활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한걸음 더 깊게 생각을 해보자고 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서 그렇게 흉측한 체형도 아니고(사실 몸매에 자신이 있는 편ㅎㅎ) 얼굴도 그리 밉지 않다. 그러나 ‘내 집에서’ 속옷을 입고 다니는 영상으로 상대가 해올 협박이 왜 무서울까? 집에서 속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당연히 가능하다.


그게 공개될까 무섭다고 한다. 속옷을 입고 기벽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뭐 가끔 필요이상의 텐션으로 뛸 때가 있다만) 제 집에서 속옷 입고 샤워하러 가는 사람이 무슨 흉이라고 그걸 두려워하는가? 행여 그를 포르노 사이트나 징그러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그들의 추하고 못난 성벽을 가여워해야지. 우리가 부끄러워할 부분이 아니라고 했다.


야동을 끊은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간다. 뇌에 안 좋다는 소릴 듣고 바로 끊었다. 이제 그런 것들을 보는 사람들과의 접점은 없다. 뭐 모르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언행이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외적인 부분이나 일적인 부분, 사업적인 부분에선 그럴 수 있을지 모르나 나의 내면과 존엄은 그런 사람들에게 닿지 못할 높거나 깊은 곳에 있다. 얕은 존재들이 건드릴 수 없다.


다행히 나만큼이나 T인 와이프는 동의했다. 물론 보안이 철저한 홈캠을 설치하자는 전제에는 나도 동의했다. 이런 것이다. 나의 존엄은 다른 누가 훼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마침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뒤늦게 블랙미러 1화를 보고 감상문을 겸해 적는다.


다시 말한다. 권리와 의무와 선택은 모두 자신에게 귀속된다. 이로 인한 결과를 감싸안을 즈음에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어른이, 자신의 주인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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