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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고 맥락 없는 삶.

생수배송? 착취의 진실?

by 빛나길

두서나 맥락에 관하여


내 글에는 두서가 없고 맥락이 없다. 그런 연유로 내게 가해지는 모든, 대부분의 비난에 관해서 나는 얼마든지 남 탓을 할 수가 있다. 내가 보기에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우습다. 그러면서 나는 세계의 불완전성에 대해 깨닫곤 한다. 외롭다. 외로워서 가슴이 아프다. 주어진, 다가올 시간을 잘 버티기만 하면 될 듯도 한데, 그 시간은 요원하고 일상은, 매일은 춤을 추면서 나를 놀리거나 애태우거나 혹은 날카롭게 할퀴곤 한다.


할퀴거나 베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에게 그런 ‘공격’을 당하면 더 아프다. 우리 막냉이 고양이한테 깨물리고 할퀴울 때 더 그랬다. 언제나 지나친 것은 이쪽이고 모두들 그럭저럭 잘 사는데 유달리 못 견뎌하는 존재는 누가 빚어낸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목표를 잃고 질문만이 내 안을 맴돈다. 소위 말하는 답이 없는 순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에 힘을 얻고 또 무엇에 지친 마음을 놓아둘 수 있겠는가. 곧 무너질 것을 믿어마지 않는 내 위에 올릴 수조차 없어서 허망하다. 살아온 모든 삶의 순간들이 낱낱이 부정된다 하더라도 또 알 수 없는 어떤 것, 무언가가 남거나 쌓여갈 것이기에 막막하다.


삶은 애초에 적혀질 수 없다. 공백, 행간, 뭐라고 부르던 간에 우리네 삶은 어떤 순간도 완전히 표현해 낼 수가 없다.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이 한 번쯤 해볼까? 하는 안일함으로 전업작가를 꿈꾸는 내가, 그 길에 발을 올린 순간에야 맞닥뜨리는 현실이 그러하다. 식은땀이 흐른다. 주위를 둘러보라. 애초에 좋은 교육을 받거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이렇게 외줄 위를 걷더라도 주변에서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시샘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사실 맞다. 죽어가는 나의 순간들, 낭비되어 가는 재능들과 놓쳐버린, 애초에 박탈당한 것들을 쥐어본 적도 없으며 그리워하느라 매일을 낭비하곤 한다.


겨울, 무너지기 딱 좋은 날들이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는 겨울의 찬바람 앞에 순식간에 벌거벗겨진다. 살을 에는 바람결이 휙 지나고 나면, 누군가는 달달 떨며 주저앉게 마련이고 누군가는 옷깃을 여미고 앞으로 나간다. 냉혹한 계절이다.


어디에 대해서 글을 쓰려던 것인가를 생각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니, 스스로를 위한 다기 보담도 내가 뿌려둔 똥, 뱉어놓은 헛짓거리를 위해 사이드잡을 찾는다. 숱하게 접하고 많이 공부하고, 또 찾아낸 그들의 가혹한 문법을 나만 알려다가 가여운 사람들을 위해 적는데, 결국 나를 위해 적는다는 말과 같아서 다시 식은땀이 흐른다. 이렇게 많이 흘러도 될까? 전해질 운운할 너스레를 떨려다가 그조차 아까워 마음을 접는다.


새벽시간대의 생수배송, 샛별배송 등의 아르바이트를 희망했다. ‘상사나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다. 가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이다. 그러나 주 6일, 매일하고 한 끗 차이인 그 일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아프거나 지치거나 여하한 이유들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것이 스트레스가 없을까? 아무도 압박을 가하지 않을까? 그들이 내민 계약서에는 그로 인한 책임은 모두 을에게 있다고 했다.


사이드 잡이라고 했으니 메인 잡에 영향을 주면 안 되지 않겠는가. 오전 9시에는 출근을 해야 하니, 내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4~5시간 여가 전부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읽고 쓰고, 명상하고, 운동하고 출근을 준비하는 내가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육체노동을 운동삼아 한 후, 본업에 투입하려고 했는데 구인공고에는 ‘자유출근’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전화로는 방문해서 상담을 하자고 하고, 수차례 방문상담을 거친 후, 내게 내밀어진 계약서에는 시간과 배정받을 지역에 대한 항목이 없다. 그러면서 수수료는 두루뭉술하게 3~500만원이라고 했다.


그렇게 수수료로 3~500만원을 받는 사람들의 책임범위가 어디인가 묻는다. 금액은 얼마며, 언제, 어디까지 특정되느냐고 묻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못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인지 묵묵하게 답이 없다. 수수료는 ‘차를 구매할 때’ 정해진다고 했다. 계약서상에서 트럭의 종류와 짐칸의 종류, 연식 등을 특정하고 나니, 몇천만 원대의 금액이 제시되고 차량은 내일 집 앞으로 도착한다고 한다. 그래, 그럼 내일 도착하는 차를 구매할 예정이니, 수수료를 묻자 여전히 3~500만원이란다.


그래, 300만원과 500만원은 두 배 가까운 차이가 나지만 이건 아량으로 넘어가자. 배정받는 지역에 따라 수수료도 달라진다고 했으니 어느 지역을 배정받을지를 묻자, 그 또한 담당소장과 대화를 통해 이야기할 내용이라고 한다. 아직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약속시간에 늦는 소장이라는 사람, 내 성정이 보였던지 (갑)의 자리에 신상과 정보를 적어 넣은 소위 ‘신경 써주겠다던 담당자’는 소장님과 다퉈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그분께는 말 험하게 하지 말고 나중에 본인하고 얘기하자고 한다.


계약서를 차근히 읽는다. 본 계약의 범위는, 갑과 을 사이의 것이긴 하나 ‘을‘인 나의 요청으로 이뤄지는 계약이라고 계약서에 게재되어 있다. 음… 그렇진 않은데? 추후 본 계약과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하면 최대한 말로 좋게 해결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 계약의 효력 자체는 을이 을의 영업소장을 만나 출근하기로 한 순간에 소멸된다고 한다. 음. 여기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


’일이 하고 싶습니다‘ 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문을 두들기니 기천만원짜리 트럭을 강매하다시피 하는데, 트럭을 받을 때까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영업을 하고 얼마나 할지가 정해지지 않는다. 그런 것조차 명확히 정해지지 않는 계약서를 단지 ’작성하는’ 대가로 3~500만 원의 수수료를 받고 사람들을 등처먹는다. 뭐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글쎄. 내가 보기에 이건 사람들 등을 쳐먹는 일이 맞다. 트럭을 중개하며 돈을 남길 것이고 또 수수료를 남긴다. 첩첩이 남의 등을 처먹는데, 계약서 말미가 가관이다. 만일 앞의 단서조항처럼 계약과 관련해서 불만이 있다면 구두로 조용히 잘 풀어볼 것인즉, 그래도 안 되면 이와 관련한 다툼의 법정을 서울지방법원으로 하잔다. 그래. 만일 일을 하게 된 사람이라면 평일에 쉬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주 6일을 혹독한 노동을 할 텐데, 그와 관련해서 간신히 눈 붙일 수 있는 순간들에도 화가 치밀어 잠을 설칠 즈음에야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거나 주변의 도움을 얻어 소송을 진행할 것인데, 그조차 문제가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 비용을 추가로 들여야 하는 서울지방법원으로 특정한다는 것은.


마치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노동자를 헐값에 팔아넘기던 매국노요 친일파들의 그것이 아닌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런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계약이 가능한 것인가? 물론, 그럼에도 불고하고 여러 제반조건이 잘 맞는다던가 아니면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섹터에 배정되어 진솔한 땀방울로 높은 수당을 챙기는 생수노동자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런 경우라면 조상이 도왔거나 복권을 하시지 그랬는가. 이건 비아냥이라기 보담도 그만큼 아쉬운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 당연한 세태를 꼭 한 번은 꼬집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적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인가? 왜 누군가의 피땀이 얼룩진 노력을 착취해야 하는 지옥의 착취도가 그려져야 하는 것인가. 이를 시스템적으로 행정이나 사법의 말단에서 바꾸거나 금지할 수 없는 것인가? 도대체 이걸 선택이라고, 계약서에 한 사인을, 지장을, 도장을 핑계로 ‘공정하거나 자유의지에 따른 계약이었다 ‘라고 주장하고 또 그를 인용하는 세상이 버거워 적는다. 내 일이 아니라 적는다. 내 일이었기에 적는다.


아, 중간착취의 지옥도 읽었어야 하는데…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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