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퇴고의 어려움.
잘 먹고 잘 자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명상의 어려움을 지나,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매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살다가 보니, 식욕을 통제하는 어려움에 눈을 뜬다. 채소와 과일, 살아 있는 것들만 먹으려 드나 쉽지가 않다. 욕구가 무섭다. 이 욕구들을 모조리 내려놓고 머리 박박 밀고 들어가 산중에서 생활하는 스님들께 1 존경쯤 더하려다 만다.
장모님은 어제 내 마지막 존엄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이젠 진짜 끝이 나버렸다. 실은 나의 존엄이 아니라. 내 육친의 존엄을 깨부수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된다. 얼마나 웃픈 삶인가. 웃프다는 표현은 너무 가벼워서 내 상태를 적절하게 드러내거나 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편찮으시다는 표현도 순화한 것이고, 모친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이 순탄하지 못해서 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것을 중단하고 가엽게 여긴다. 가엽게 여길 수밖에 없는 죽음의 순간에서 아내의 말처럼, 엄마를 사랑하던 때의 어린 재훈이가 나와 엄마를 지키려 든다. 그래서 속이 상한다. 속이 막 상해서 잠도 설친다.
자궁경부에서 시작된 암이 완치 판정을 기다리다가 폐로 전이되고 온몸을 거쳐 뇌로 전이된다. 주변에 어른이 한 분 안 계신다. 외롭다. 아직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어른 한 분이 안 계시니 끌어줄 사람도 그거 아니니 멈추거라 하는 분도 없다. 되려 내가 사람들께 그거 아니니 그만두거라. 멈추거라 하는데 애새끼 하는 말을 누가 귀담아듣는가.
열 살 이후로 한 번도 존경을 준 적이 없다. 긴긴 세월, 양친은 얼마나 사무쳤을까. 내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제 그 결과가 적힌 성적표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이전의 글들에 수차례 적었지만, 받은 것이 없으니 줄 것이 없고 그래도 낳여져 패질을 당했으나 도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아침저녁 전화도 드리고 쉬는 날에는 기호에 따라 아랫사람 마냥 음식도 사다 바친다.
물론 절대로 기껍진 못하다. 애초에 내가 받은 모든 것들은 알 수 없는 ㅅ 한 조각이라고 봤을 때, 이게 사랑의 ㅅ일까 의심하길 그만두고 웬수의 ㅅ에 확신하기에 이른다. 이상하게 불교에서 하는 말이 다 맞아 들어가니 삶의 퍼즐을 진즉 맞추고 다음 생을 없애자는 목표가 생겨부려따.
최근에 간 문안에서 모친의 솟아난 뿔을 봤다. 놀랐다. 놀란 다음 슬펐다. 항암치료인가. 아니면 암세포가 뇌까지 침투해서 모든 것들을 삼키고 있는 것인가. 늘 빵모자를 쓰던 이유가 저것인가. 아니면, 슬프게도 이제 나를 쪼아 죽이려던 악마가 다급함에 뿔을 가릴 새도 없었나 싶어서 슬펐다. 이 슬픔은 크리스마스에 적기 적절해서 씁쓸하고 웃프다고 표현하기엔 가벼워서 웃프플수 있겠다. 슬픔이 조금은 더 묻어야지.
그즈음이었나. 모친의 유아기적 퇴행이 시작되었다. 간간하게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서 나는 나의 옳음을, 그녀의 틀림과 비참, 반면교사를 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으면서도 아직은 내 안에 알 수 없다기보다 알고 싶잖은 것들이 있어서 그녀의 존엄을 지키려다 누구에게서 지키겠는가 싶어 쓴다.
일화 1. 핸드폰을 들고, 내가 죽어도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말라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날더러는 늘 주변과 잘 지내라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나마 혈육인 이모와 거의 주종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도 같지만, 최근에는 그마저도 부서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거나 사랑해주지 못한 그녀가 안타까워 이런 부분을 지켜주고 싶었고, 피상적인 관계들은 모조리 필요 없다는 삶의 방식이 옳은 것을 확인받았다.
잔인한 일이지만 그랬다. 내가 사업자를 내고, 모친에게 주방을 맡긴 적이 있다. 사업자를 하나 더 갖고 있었고, 그쪽의 일이 훨씬 중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믿을 만한 사람이 참 드물다는 인생의 진리를 이전의 가게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모친에게 맡겼다. 모친은 무참히 배신하고 유린했다. ‘내연남으로 의심’하던 사람에게 내 돈을 빼돌려 그에게 주었고 그것은 기가 차올라 피가 거꾸로 솟는데 거꾸로 매달린 느낌이었다.
일화 2. 내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확실하다. 부끄럽지 않다. 부모에게 상소리를 퍼붓고 손찌검을 한 적도 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소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폐암 걸린 아내를 두고 장지문 하나 건너에서 담배를 버끔이던 부친, 정오를 조금 지나 출근해서 새벽 5시 언저리까지 가게를 운영하고, 비 오면 비를 맞으며 배달하고 덥고 추운 것들을 견디며 한 푼 더 벌어서, 그렇게 벌면 존엄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어린 날의 내 통수를 갈기며 내연남이 있는 당구장에 내려달라는 사람, 밤을 새우고 들어와 문을 잠그고 잤다. 내게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고 욕구에 쫓기는 마소(마소도 말은 웬만큼 알아듣는 가축이니 기분 나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런 그들에게 존재의 존엄을 가르치던 사람. 뱉은 말을 지키고 한다면 해내는 사람이 되어주었다.
이제 대학병원에서 치료의 여지는 없어서, 요양이나 호스피스로 전원을 요청했고, 그렇게 전원한 요양병원은 참담했다. 부친이 전적으로 선택한 병원인데, 병동 입구부터 지린내가 코를 움켜쥐었고, 주변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문자 그대로의 산송장이었다. 평균나이가 여든은 되어 보이는 거동도 못 하고 생활도 못 하는 존재들 대기업 사장이던 외삼촌들은 네 부모 아니냐며 네가 챙기라 했다. 그래 내 부모니 이건, 이 정도는 해주자 하며 더 나은 병원으로 전원을 알아보아 진행하려는 찰나였다.
유아기적 퇴행과 본래의 비겁함, 이중적인 못남. 어떤 것들이 먼저 치고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말도 없고 적응도 잘 못하고, 전날 나는 없는 가족 단톡에 ‘다 거짓, 훈이 아빠도 이 병원도 다 거짓‘이라는 카톡 하나 달랑 남기고 단톡방을 나가는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에서 전원을 결심했다. 그러나 하루 새에 병원 간호원과 회진도는 의사에게 알랑방귀를 뀌면서 ‘젊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이나 따둘 것을 그랬어요, 사람들 도와주게’ 했단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요양병원 사람들과의 끈적한 유대가 생겨 전원을 거부했다.
내 전화를 받지 않는 순간은 그때부터였다. 일을 하느라 전원에 참여하지 못하여, 행정과 조율을 모두 끝낸 후에 부친과 이모를 보내 전원을 마무리하시라 말씀드렸는데 해내지 못했다. 그간 ’인간의 구실‘을 다하고자 아침저녁으로 건 전화를 받지 않아, 일말의 걱정을 담아서 이모에게 묻자 이모는 네가 무서워서 전화를 못 받나 보다 한다. 그래 그럴 수는 있는데, 전화기를 꺼놓을 정도인가는 싶어서. 면회를 다녀온 후에 다시 물으니 ’너는 절대 오지 못하게 해라.’ 했단다.
가여운 사람. 나는 그녀가 스스로의 카르마에 짓눌리고 있는 것을 본다. 자격도 없이 내게 쉬이 뱉은 말과 말단의 욕구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한 행동들의 댓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화해나 용서를 얘기하며 퉁퉁 부은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적실 뻔했으나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더라. 이건 안타까운 일이고 가여운 일이라. 남아있던 감정들의 잔불도 꺼져버린 후다. 일방적인 이해와 용서만 있다. 여태는 이성과 미움이 차지하던 자리에 새 주인들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지키고 싶은 부분, 지켜줄 부분은 있었다. 도대체 철이 들잖는 다른 가족, 의료인이랍시고 꼴값을 떠는 장모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보이고 싶잖은 것은 아니어서 부끄러움은 내 몫이 아니지만 화를 내는 것은 맞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거짓을 말하더라. 모친은 거짓말을 잘한다. 근데 멍청해서 들킬 거짓말들을 한다. 언 발에 오줌을 자주 눈다.
장모가 몇 달에 걸쳐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고, 간혹 정신이 멀쩡할 때에 모친과 통화를 하곤 했다. 그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받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 일인실로 옮겨갈 일정이 없는데?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어서 부친께, 이모께 물으나 내가 옳다. 다인실 병동이 부끄러운가? 왜 부끄럽지 아픈 상황에서도 그런 거짓말할 정신이 있나? 저의, 함의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내보일 상태가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그건 존엄함이 아닌데, 거짓으로는 존엄을 득할 수 없는데, 돈으로도 살 수 없는데, 이제서야 그 니즈가 생겼지만 어리석어서 거짓말을 하는 환자를 감싸주기로 한다.
면회를 오지 마시라. 얼마 전 모친의 확정적 죽음에 상조를 들어야 하느냐고 물은 전화에 ‘(내) 상조는 있으니까 걱정마라‘ 하던 장모와의 대화가 생각나 싸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수차례, 통화를 할 때마다 강조한다. 말이 안 통하는 존재를 가까이 두어야 하는 것이 운명인가 싶다. 이제 한 사람이 가니, 새 사람들이 온 것은 아닌가 싶어 싫다. 내 부모에게도 못한 일을 이젠 더 하기 싫다. 나는 무력함을 못 견디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한다.
생각해 보면 그냥 내가 존엄하지 못하거나 말에 힘이 없는 것인가. 주변에 수차례 경고를 해도 세상이 쉽사리 바뀌거나 나아지지 못하는 것은 나의 탓이 아닌가 싶다. 삼촌이 네 부모잖아 말한 날에, 이모가 울면서 여긴 아니라고 눈물을 흘린 순간에 같잖게도 의료인이고 가정간호 논문까지 적어낸 위대한 간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했고, 도움은 없었다. 그리고 알량한 도리 운운하는 장모에게 재차 당부했다. ’면회 가지 마시라.‘
빌어먹을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왜 사람들은 둥둥 미쳐 날뛰는가를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아내에게 연락이 와서 무슨 케이크를 좋아하시냐는데 케이크는 무슨,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다. 사돈의 도리, 인간의 정 운운하더라. (개짓거리 마라 병신아, 돼먹잖은 인간아)를 생략하고 ‘제 말이 진짜 말 안 같으시죠?’ 하고 끊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도리를 멈춘다. 아무리 거듭 말해도 내 말은 그대들의 귀에 맞지 않아서, 니체의 외로움이 엄습한다. 그래도 내 말을 이해하는 한 명은 있어서, 세상에 나와 내가 선택한 단 하나의 가족이 내내 밤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기어 나와 키보드 앞에서 쉼 없이 손을 놀리는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춘다.
그러나 내게 더 이상 장모는 님이 아니요, 장인은 어른이 아니다. 육십 넘어서 철 없이 제 하고픈 대로만 하는 모지리들을 존귀하게 대할 수 없어서 멈춘다. 결혼을 전후로 내가 옮긴 말들의 진실을 깨닫고 뱉은 말을 지키는, 뇌세포의 사멸로 유아기적 퇴행을 겪는 모친이 두려워 벌벌 떠는, 나의 진면목을 아무리 말해도 모르던 그들에게 이제는 보여줄 때가 되었다. 같잖은 것들, 멍청한 것들에게 자기 행동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 내 삶의 기저요 근간이 아니던가.
크리스마스도, 자격 없는 존중도 끝이 나버렸다. 작가 이영도의 문장처럼 ’잔치는 끝났다. 집에 갈 시간이다 멍청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