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나다
오늘도 난 서점에 간다. 책을 보며 우울함을 달래는 건 내 오래된 습관 중 하나.
책은 늘 손을 내밀어 보듬는 역할을 하느라 온종일 바삐 산 내게 쉬어가라고 말없이 등을 내미는 언덕 같다. 책을 읽고 있으면 등받이 의자에 기댄 것처럼 내 마음 한없이 편안하다.
마음에 뒷짐을 지고 책 속으로 조용조용 걸어 들어가면 코끝을 스치는 기분 좋은 내음. 향긋한 나무냄새를 따라 들어간 숲에선 재미난 이야기들이 사시사철 늘 푸른 나무처럼 서서 나를 반겨주는데…
때때로 문장들 사이로 빛나는 단어들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 나온 볕뉘처럼 아름답다. 손바닥 위로 잡힐 듯이 아른거리는 빛 조각에 내 마음은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강한 햇살 아래 머물 땐, 너른 그늘을 펼쳐 그물 침대가 되어주는 책장. 빗방울 아래 혼자인 나를 대신해 홀로 비를 맞으며 우산이 되어주는 나무를 볼 때면 난 멋진 친구를 만난 듯 든든하다….
강한 바람이 불어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자기만의 삶을 이어가는 나무를 보며 나는 꼭 뭐가 되어야만 했던 걸까 생각한다. 아니, 난 그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되고 싶었던 건데…. 그런 순간이 없었던 것만 같아서 억울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난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 속 일부가 되고 싶다.
일한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난 지금의 삶에 회의적이고 무료하고 공허하다. 흰 가운을 입고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보내는 시간은 어쩌면 보람찬 길인데도 때때로 그것이 나를 옥죈다는 생각이 들면 훌쩍 떠나버리고만 싶다. 벗어나고 싶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채 혼자서 터벅터벅 걷고만 싶다.
현실에 너무 지쳤다고 생각했다.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병이 무엇일까?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은 부러운 시선이다. 그러나 난… 난 행복한 걸까?
그래도 이렇게 마음이 고개를 들며 갸우뚱할 때 종이 냄새가 나는 책이 생각나는 건 다행일지 모른다. 무언가 탈출구가 있는 셈이니까. 책 속에 들어가면 그래도 좀 나아지고 좋아지니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열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책 속엔 편안하고 아늑한 세계가 있다. 직업이 나를 규정하려 들 때 책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며 어떤 가능성으로 나를 이끈다. 그럴 때면 난 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난 나이고 싶은데, 나를 위해 살고 싶은데…
문득 부모님 얼굴이 스친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도시로 보냈다. 부모님은 무엇보다 내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시골에서 의사가 된다는 건 크나큰 성공에 속했다.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해 낙향한 아버지는 내 교육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러니 난 아버지가 쏟은 노력의 수혜자였고, 나는 당연히 아버지가 제안하는 대로 가이드를 따라 삶이라는 여행길로 들어선 거였다.
난 길이 그저 그거 하나뿐인 줄로만 알았다. 외길이라 늘 외롭고 치열했다. 앞만 보는 인생이었다. 부모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선택한 길이었다. 내 마음이 내게 질문을 할 때면 난 그러면 안 된다며 애써 내 마음을 부정했다. 그래도 아버지 덕분에 굶지는 않고 산다고. 그러니 지금 이 길이 최선이고 여기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아무튼 오늘은 상담이 많았다. 귀가 찡했고, 피를 본 것도 아닌데 현기증이 일었다. 으레 그랬다. 하얀 가운을 벗고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이마에 땀을 닦고 마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너무 지쳐 있었나 보다. 버스에서 꾸벅 잠이 들었고 차에서 내렸을 때는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멍 때리다 내릴 곳을 놓친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다음 버스를 검색했지만 버스가 오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했기에 난 시간을 때울 겸 상가들을 비집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상가들, 낯선 표정의 사람들. 난 허둥대며 주위를 살폈고,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언제부턴가 낯선 곳은 무섭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무모한 도전처럼 난 방황했고 방황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웬 낯선 길에 서있었다. 길은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이었다. 발이 푹신푹신하고 편안해지자 마음도 좀 누그러졌다.
어? 여기 이런 데가 있었나?
빌딩이 사라지고 낮고 정겨운 울타리 담장이 보였다. 집들은 작고도 옹기종기 붙어 있어 귀엽기까지 했다.
여기가 어딘지 살피려고 핸드폰을 꺼냈지만 대략 난감해졌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난 우주 미아가 된 것처럼 암담해졌다. 날은 어둡고 편의점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 늑대 울음소리 같은 것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심장이 쪼그라들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기요. 저기요.
어디선가 울음 섞인 목소리가 황급히 날 불러 세웠다.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서는 어떤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운명은 그렇게 다가와 나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고유한 소리에 집중하게 했다. 난 소리를 따라 걷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장이잖아?
눈앞에 드문드문 펼쳐진 천막은 꼭 하나의 숲처럼 아늑해 보였다.
아니, 이런 데 이런 곳이 있었네.
시장은 이제 파장 무렵이었다. 장내는 물건을 팔고 남은 것들은 정리하느라 바쁜, 좌판을 접는 사람들로 붐볐고, 여자로 보이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간절하게 발길을 잡아끄는 목소리… 로….
저기요. 저 좀 도와주세요. 여기에요…
난 좀 더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무리했던 모양이었다.
헛소리가 들리다니. 이명인가?
난 내 면역력을 의심했다.
환청이 다 들리다니. 이거 안 되겠군.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왔던 쪽으로 다시 뒤돌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