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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맞닿는 공간, '부인의 시대'를 마주하다

창작희곡의 발견

by Via Nova

어젯밤, 경기문화의 전당 소극장에서 경기도극단의 창작극 '부인의 시대'를 관람했다. 소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피부관리실이라는 낯선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경기도극단이 매년 개최하는 창작극본 공모에서 2023년 대상을 차지한 이미경 작가의 작품이 원작인 이 연극은 김광보 감독의 연출 아래 작년에 낭독극으로 선보였던 적 있다. 1년이 넘는 기간 다져간 배우들의 땀방울이 무대 위에서 선명하게 드러냈다.


무대는 경기도 안산의 재개발 지역에 위치한 작은 피부관리실 한 칸에 불과했지만, 그곳에는 다섯 여성의 삶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누군가의 피부를 매만지며 자신의 피부 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감추던 그들. '부인'이라는 단어가 가진 두 의미 '결혼한 여자'와 '부정함'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의 비밀과 세상에 의해 자신들이 부정되는 경험을 동시에 마주한다.


피부관리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은 오히려 인물들의 내면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순간은 오직 공사장 굉음뿐이다. 본업이 남의 피부를 관리하는 여성들이지만, 정작 그곳에서 그들의 속살들은 하나둘 벗겨지고, 부인하고 싶은 진실들은 마사지 공간에 낱낱이 드러난다. 생존을 위해 상처를 주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사건을 통해 다시 결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서 이들의 감정이 살아있는 상처처럼 아팠으나 중간중간 더해진 유머가 긴장을 풀어주어 연극에 대한 집중력을 시종일관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만 "후진국에 와서 후지나"라는 대사가 귀를 스칠 때, 나는 객석에서 몸을 움츠렸다. 블랙코미디의 특성상 불가피했을지 모르나, 그 말이 품은 차별의 결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금이 다시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안젤라의 얼굴에 스치는 그림자를 보며 나는 내 안의 편견도 돌아보게 되었다.


힘겨운 자영업자 피부관리실 사장, 늦둥이 아들만이 희망인 중년의 남실장, 위중한 엄마를 모시는 조선족 송실장,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 온 필리핀 안젤라, 그리고 아파트값 상승으로 신분상승을 노리는 부녀회장.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이었다. 특히 부녀회장의 얼굴에서 읽히는 탐욕과 위선은, 어느 순간 관객인 나마저 그에게 징벌을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왜일까? 아마도 우리 각자가 삶에서 마주한 부당함의 기억이 그녀의 얼굴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은 단순한 억지가 아닌,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처절한 몸짓으로 느껴졌다.


마지막 장면, 피부관리실을 끝까지 지키려는 이들의 모습에서 최근 읽은 ‘소년이 온다’가 생각나서 광주의 오월이 떠올렸다. 사람이 분명 그곳에 숨 쉬고 있는데, 중장비는 망설임 없이 다가온다. 인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공간에 자본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차갑게 밀려와, 그 자리에 새로운 콘크리트를 부어 넣을 준비를 한다. 이 무심한 진행의 잔인함이 목구멍을 메이게 했다.


공연장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김광보 감독이 연출한 '부인의 시대'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의 한 조각을 들춰내는 거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쩌면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얼굴들 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공간이, 삶이, 기억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지워지고 있을 테니까.


어제 공연을 시작으로 이 작품은 금토일 막이 오른다. 부인의 시대 외에도 '우체국의 김영희 씨'라는 작품도 같이 볼 수 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명품 연기를 보고 싶다면 경기문화의 전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길 권한다. 바쁜 일상에 문화라는 작은 숨결을 들이마시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부유하게 만드는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법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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