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붉은 강물이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헌혈버스가 회사 앞에 나타났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팝업스토어처럼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다만 팝업스토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슬그머니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 '피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가, 문득 생각을 바꿨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헌혈에 대해 좀 삐딱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적십자 운영 논란 때문이었다. 내가 공짜로 준 피를 병원에서 비싸게 쓴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게 뭔 장사냐'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한 일을 안 할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나에게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예전에 몸이 좀 안 좋았는데도 '그래도 누군가는 도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헌혈했다가 원형탈모가 생긴 적이 있었다. 머리에 동전만 한 구멍이 뻥 뚫려서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때 깨달았다. 선행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았다. 내일이 주말이니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누워있을 시간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나는 담배도 거의 안 피우고 술도 별로 안 마신다. 시장에 내놔도 '무농약 유기농 혈액'이라고 광고할 만한 상품이다.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은 여전히 무섭다. 참 이상한 일이다. 모기가 물 때는 별로 신경 안 쓰면서, 멸균된 바늘로 찌르는 건 무서워한다. 간호사가 다정하게 말했다. "편하게 호흡하세요. 금방 끝나요." 그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마음이 놓였다. 마치 명상을 동반한 요가선생님 같다.
피를 뽑히는 동안 묘하게 평온했다. 빨간 액체가 투명한 주머니로 흘러들어 가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성인 몸속에는 대략 5리터의 피가 흐르는데, 오늘 내가 기부한 건 400ml다. 전체의 8%도 안 된다. 몸이 '어? 뭔가 좀 적네?' 하고 느끼기도 전에 다시 채워질 양이다. 혈장은 하루 이틀이면 복구되고, 적혈구는 두 달이면 완전 새로 고침이다. 헌혈을 장려하는 문화를 위해선 가까이, 재미있고, 의미 있게 만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헌혈증을 받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종이가 내 피와 누군가의 희망을 잇는 다리구나. 헌혈은 무료다. 하지만 이걸 검사하고, 보관하고, 운반하는 데는 돈이 든다. 그래서 병원에서 적십자비를 낸다. 일종의 배송비 개념이다. 그 과정이 완전히 투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피가 필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응급실의 환자에게, 수술대 위의 아이에게, 불의의 사고를 당한 누군가에게.
헌혈을 마치고 나오니 가을 햇살이 따뜻했다. 내 몸에서 나간 400ml가 어디선가 누군가의 생명력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헌혈을 숭고한 희생이라고 한다. 나는 좀 다르게 본다. 희생이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깝다. 400ml를 투자해서 누군가의 내일 하루 전체를 얻는다면, 이보다 좋은 투자가 또 있을까.
'헌혈은 사랑입니다'라는 낡은 문구가 새삼 맞는 말 같다. 곧 있으면 내 'A급 혈액'이 어디선가 누군가를 살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빨리 나아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그 사람도 소매를 걷어붙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늘이 좀 더 의미 있어진다. 오후에 일이 있어 집중하며 일했더니 뒷목이 뻐근하다. 아, 내일 아침에 어지럽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