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섬, 잠시 쉼
더운 한여름, 더위와 일상에 지친 나는 여름휴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통장에는 휴가를 다녀오기엔 다소 빈약한 숫자만이 있어 슬픈 나날이었다. 그러던 차 오랜만에 친구와 카톡을 하던 중, 여러 소식에 밝은 기자 친구가 나에게 무언가 추천해 주었다.
“여기 봐. 여기 프로그램이 좋은데 가격도 저렴해. 청년 타깃 프로그램인데 여름휴가 가기 딱이야! 서울에서 멀지도 않아.”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된 링크는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강화유니버스의 아삭아삭순무민박 잠시섬 프로젝트였다. 2022년 당시 5만 원이라는 가격에 2박 ~ 5박까지 자유롭게 숙박이 가능한 혜자로운 프로그램이었다. 살펴보니 다양한 워크숍 프로그램이 있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들게 하는 곳이었다.
나에게 강화도란 역사책에서 보았던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위해 수도였던 곳, 조선시대 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있던 도시, 특산품인 순무김치와 쌀, 약쑥 등이 있는 원산지 정도의 느낌이었다. 아직 방문해 보지는 않았지만 ‘강화도에 뭐가 있었지’를 생각하다 보니, 막상 강화도에 가면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꽤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올해는 여기로 가자!”
이렇게 광복절을 낀 2박 3일간 나는 여름휴가를 즐기러 강화도에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나와 강화의 첫 만남이었다.
“아침 산책 같이 가실래요?”
늦은 밤 체크인을 하고 다음날 아침. 지금은 남자 숙소로 바뀌었지만, 당시 여자도 묵을 수 있었던 스테이 아삭에서 나는 가뿐하게 눈을 떴다. 전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진행한 회고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비슷한 아침 시간에 함께 일어났다.
강화 유니버스에서 운영하는 아삭아삭순무민박의 특징 중 하나가 매일 저녁 이뤄지는 회고이다. 한 마디로 오늘 하루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오늘 인상 깊었던 일이나 여행 다녔던 내용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서로 정보를 나눌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재미있다. 종종 강화에 귀촌해 살고 계신 분들이나 지역주민들이 오셔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한다. 같이 묵고 있는 숙소 여행자분들을 알게 되어 내일의 여행 동반자가 되기도 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전일 회고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에 함께 일어나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테이블에 모여 ‘오늘은 무엇을 할까’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침 산책을 나서려는 아주머니께 동행을 청했다. 최근 자녀분들이 독립하고 다시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시는 중이라 좋다는 중년의 아주머니셨다. 나는 여름휴가로 강화도를 처음 왔다는 이야기를 함께 하며 느긋하게 함께 강화의 고즈넉한 골목길을 걸었다.
낮은 담장과 건물의 소도시 강화. 대도시의 높은 빌딩들이 익숙했던 시야에 탁 트인 뷰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강화도의 골목길을 함께 둘러보았다. 교회 앞에서 기념샷도 찍고 산책을 하던 중 어느새 성공회강화성당에 도착했다.
“우와, 이곳이 성당이에요?”
바깥에서 본 성공회강화성당의 첫인상은 색달랐다. 처음엔 한옥이라서 그런지 성당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최근 지어진 성당들과 유럽여행에서 보았던 뾰족한 건축들이 너무 눈에 익어서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성당의 아우라가 있었다. 당시 인스타그램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의 모습. 처음에는 무슨 절인가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정말 초기에 지어진 성공회 성당이었다. 하긴 조선시대에 들어왔으면 그땐 건물들이 전부 한옥이었을 테니까. 신기하게도 한옥 지붕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입구의 태극무늬가 십자가 모양이었다. 처음엔 절이나 민속신앙 쪽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크리스트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초기의 모습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성당 부근은 나무도 많고 탁 트인 전경이 멋져 강화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 아주머니께서 나보고 잠깐 서있어 보라며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해 주셨다. 찍어주신 사진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래에서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바꾸며 촬영해 주시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는데, 사진에는 기럭지 길고 늘씬한 여성이 예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내 인생샷 중 하나였다. 나는 평소 그렇게 사진이 잘 나오는 편이 아니었기에 정말로 감탄했다.
“사진 너무 잘 찍으시는 거 아니에요? 진짜 잘 나왔다! 정말 사진 잘 찍어주셨어요. 우와, 감사합니다!”
“딸 사진을 계속 찍어주다 보니 자연히 늘었어요. 예쁘게 찍어줘야 하니까.”
아주머니는 따님의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 실력이 느셨다고 쑥스럽게 이야기하셨다. 와아... 포토그래퍼 뺨치는 아주머니는 이어 식빵 전문점에서 미니 식빵과 물까지 사주셨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날 미니 식빵을 사 먹었던 강화 시내에 있는 식빵 전문점은 나의 최애 빵집이 되었는데, 적당히 부드러우면서 적절한 양이 마음에 들었다. “아빠랑 식빵이랑”이라는 가족적 이름의 베이커리. 약간의 단맛이 나고 계피향이 은은한 미니 시나몬 식빵이 내 취향이었다. 아마도 여름휴가 당시의 좋은 느낌이 계속 남아서 쭈욱 사 먹었던 것 같다.
산책하며 나누었던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서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사실 초등학교 때 꿈을 발표해야 했던 시간 외에 남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로부터 조금씩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서 2년이 지난 후 작게나마 이렇게 독립출판을 준비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중단했던 시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성공회강화성당 아래에 있는 공원에 잠시 앉아서 강화의 풍경을 바라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코로나19 전후로 여러모로 정말 많이 힘들었던 시기가 지나고 이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한창 힘들 때는 이런 시기가 다시금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것 또한 지나갔고, 돌고 돌아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가 돌아온 것이 감사했다. 푸르른 공원에 마치 고양이처럼 앉아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잠시 만끽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