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제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신흥멘탈(申興Mental)]

이 글은 독립탐정언론 <신흥자경소>에 2026년 3월 13일(오후 7시 22분) 올라온 콘텐츠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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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자경소] 일본만화 ‘간츠(GANTZ)’ 16권에는 ‘타케시’라는 어린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아빠는 일찍 죽었고, 엄마에게는 양아치 같은 남자친구가 한 명 있다. 집에 놀러 온 남자친구는 맨날 타케시 머리를 때린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는 자기가 사놓은 푸딩을 먹은 타케시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타케시는 상상 속 히어로(Hero)인지 만화 캐릭터인지 모를 ‘근육라이더’를 스케치북에 그리며 죽어간다.


‘근육라이더. 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근육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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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어쩌면 10대 후반~20대 초중반 시절의 필자도 타케시 같은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어디선가 ‘근육라이더’ 같은 강력한 존재가 등장해 나를 도와주기를 은연중에 바랐는지 모른다.


명랑하고 즐거웠던 중학교 시절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이상하게도 삶이 급격히 달라졌었다. 주변 공기 자체가 확 바뀌어 있었다. ‘선생’이라는 작자나, ‘주변 애’들 전부가 마치 ‘적’처럼 보였다. 나만의 망상이었을까. 슬프게도, 실제로 내 영혼을 파괴시키는 공격이 주변으로부터 쏟아졌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온기가 가득한 집 침대에 바짝 웅크린 채, ‘상처받은 어린 영혼’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잠했다. 양아치에게 얻어맞아 죽어가던 타케시가 ‘도와주세요... 근육라이더’라고 웅얼거렸듯, 필자 역시 지옥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려 하기보다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구제되기를 바랐던 일면이 마음속에 있었다.


그런 침잠 속에서도 당시 필자는 늘 ‘육체의 힘’을 간과했었다. 더 나아가 육체 운동에 과도하게 매달리거나 근육을 키우는 부류를 한심하게 여겼다. 20대 초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정신’이나 ‘지성(知性)’ 없이 무식하게 육체에만 매달리는 바보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 머리만 비대해진 한 여류작가가 그런 식으로 쓴 문장 따위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 시절 필자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에 절여져 뭔가 우월감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몸과 마음은 계속 병들어갔다. 겉으로는 ‘정신을 우위로 보는 사고방식’에 젖어 우쭐해 있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언제쯤 이 고통이 끝날까...누가 제발 나를...’


이라고 되뇌었다. 타케시가 ‘도와주세요... 근육라이더’라고 웅얼거렸듯, 당시 필자도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해나가지 못하는 본인 대신, 무언가 초월적인 강력한 존재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던 일면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심리는 현실 속 태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마다 ‘누군가 나를 전격 발탁하거나 물심양면으로 도와서, <나>라는 존재를 성공한 형태로 만들어주거나 하다못해 근사한 영역으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하는 의존적 심보가 가득했다.




그러다 군대에 갔다. 군대에서도 여지없이 괴롭힘은 있었다. 육체가 약한 필자를 더 만만하게 보고 괴롭히는 부류도, 역시 존재했다. ‘정신’이나 ‘지성’을 내세우는 우월의식이 더더욱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상병 때부터였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군대 안 ‘체력 단련실’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다. ‘육체운동을 하는 자들을 한심하게 봤던 마인드’를 탈피해 드디어 변화한 것이다. 전역을 하고 사회에서도 운동은 이어졌다.


초기 목적은 아마 ‘벌크업(근육량 증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엔 벌크업이든, 살크업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다. 살이든 근육이든 뭐든, ‘거대한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보디빌더’나 ‘유명배우의 잘 빠진 몸’을 목표로 운동할 때, 나는 항상 ‘씨름인 시절의 강호동’을 마음속에 그리며 역기를 들었다. 그렇게 몸이 점차 커지면서부터 주변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덜 받았다. 누구나 일정 ‘선’을 지키려 했다.


마르고 나약한 10대 후반~20대 초반 필자가 겪던 그 무수히 많은 부당한 사건들, 만만히 보고 조소하던 시선들,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고 달려들던 하이에나 같은 부류들, 예의를 갖추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인간들이 내 주변에서 차츰 사라져 갔다.


결과적으로 20대 초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 필자는 목표로 하던 거구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격투 관련 종목도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우월감’에 절여져 있던 20대 초반 필자처럼, 누군가는 격투 관련 종목을 익히는 현재의 필자를 보고 유치하고 한심하게 여길 것이다. “세상이 무슨 원시사회인 줄 아느냐?”, “법이 있고 문명이 있는데 무슨 격투술을 익히냐”라며 뭐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필자는 그간 사회 곳곳에서 각종 아르바이트 및 육체노동 등을 통해 지극히 냉혹한 현실의 원리를 받아들인 지 오래다. 그래서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극히 리얼(Real)한 현실 속을 더 명확히 체험할수록, 더 분명하게 깨달아왔다.


‘나’를 구제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만일 ‘내’가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다면, 외부에서 볼 때 ‘강해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아무것도 없는 내가 사회 어떤 영역에서든 내 목소리를 내며 내 권리를 ‘그나마’ 지킬 수 있다. ‘법’조차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하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얼마나 ‘나’를 경제적·정서적으로 도와주든 그와 상관없이, 결국 인간은 혼자다. 결국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각종 냉혹한 현실은 전부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옆에서 다소 도와줄 순 있다 해도, 언뜻 도움 되는 조언을 해준다 해도, 결국 삶을 직접 살아가는 건 본체인 ‘나’ 일뿐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걸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지극히 냉혹한 밑바닥 사회원리 안에 잔혹하게 내던져져 봤던 인간들은(특히 남자라면) 어떻게든 육체를 단련하게 돼 있다. 그걸 겪지 못한 ‘화초’ 부류들은 이성(異性)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미용 목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겠지만, 가진 것 하나 없이 몸뚱이만으로 사회에서 각종 모욕적인 일을 겪으며 분투(奮鬪)해온 ‘잡초’ 부류는 ‘생존’을 위해 몸을 불린다. 인바디 기계로 체성분을 재며 골격근량·체지방이 어떻게 나오는지 따위는, 잡초들에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에겐 근육량 수치보다도, ‘거대해 보임으로써 만만해 보이지 않는 외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멋있거나 아름다워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폭이나 건달처럼 보이는 걸 원한다.


미국 할렘가 등 거칠고 범죄 많은 지역이 좋은 예시다. 유독 문신을 했거나 거친 외양의 사람들이 많은 동네 말이다. 그런 동네에서 자라며, ‘내 몸은 자신만이 지킬 수 있다’는 냉정하고 처절한 경험을 계속 쌓아온 사람들에겐 ‘단정함’·‘번듯함’이라는 건 생존에 불리한 요소일 뿐이다. 돼지사료를 먹고 덩치를 불리는 조폭들처럼, 어떻게든 강해 보이기 위해 덩치를 한껏 불렸을 청년들 숫자가 그런 동네에선 꽤 될 것이다. 혹은 체질상 그게 불가능하다면 문신이라도 온몸에 도배해야 했을 것이다. 총을 소지하거나 싸움을 연구하는 것 역시 매우 당연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전신 문신’이나 ‘과도한 살크업(살 찌우기)’은 건강에 좋지 않고 보기에도 나쁘다. 하지만, 그러한 보편적 시선만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건, 그들의 처절했던 삶의 배경과 과정을 도외시한 것이다. 그들이 과연 그게 건강에 좋지 않고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걸 몰랐을까.


위압감을 내뿜는 선택지를 고른 그들의 삶이, 과연 ‘온실 속 화초’의 삶처럼 아름답고 무난하기만 했겠는가.


그들이 과연 그 선택지의 단점을 모르겠는가. 건강을 잃거나, 혐오스럽다며 사회 구석으로 더 내몰릴 수 있다는 걸, 그들이 왜 모르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 삶의 여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독하고 냉정한 밑바닥 사회원리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그런 길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고, 결국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며, 험난한 인생 역정에서 ‘나’를 구제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는, 그 매우 냉혹한 밑바닥 진실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뿐이다. 더구나 가진 것 없이, 오로지 야생에서 처절하게 살아남아야만 했던 처지였다면, 더더욱 강해 보이는 외양에 집착하게 됐을 것이다.




혹시 본의 아니게 어쩌다 험난한 인생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타케시나 과거 필자처럼 누군가 강력한 존재가 나를 도와주지는 않을까 염불만 외고 있다면, 이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타케시가 바라던 ‘근육라이더’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바로 ‘당신’ 자신이 본인을 구제할 강인한 존재가 돼야 한다.


만화 속에서 타케시는 자신을 도울 근육라이더를 찾았지만, 결국 만화는 허구일 뿐이다. 현실 속에선 없다. 더구나 피 한 방울 안 섞인 ‘100% 타인’이 당신을 구제할 리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눈앞의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상황을 적극 타개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영원히 오지 않을 ‘근육라이더’를 기다리며 눈앞에 당장 마주한 현실을 회피할 것인가, 말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주변인은 당신이 겪는 괴로움을 진정 자신의 일처럼 느끼지 못한다. 오로지 ‘내’ 눈앞에 닥친 일은 ‘나’만이 뼈저리게 겪는 일이며, 그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생존과 정면돌파를 위해 택한 내 선택지가, 추후엔 나를 옭아매는 부작용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을 해야 할 정도로 현재의 당신이 절박하다면, 추후 찾아올 부작용도 겸허히 감내하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왜?


다시 말하지만, ‘나’를 구제할 수 있는 건 ‘나’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든 당장 잔혹한 일을 겪을지 모르는 험난한 삶의 여정 안에 있는 사람은, ‘온실 속 화초’들의 생활방식과 동떨어진 선택지를 그저 ‘내 길’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선택으로 인해 추후 누군가는 빨리 죽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치명적인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뼈저린 후회 속에서 인생 후반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험난했던 인생사를 떠올려보면, 그 선택을 두고 반드시 틀렸다고만 힐난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훗날의 부작용이나 최후를 따질 겨를조차 없이 그걸 선택해야 했거나, 그 모든 걸 다 예상하고도 각오하며 그 길을 걸은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마음이었기에 이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고, 더불어 ‘인생 후반전’이라는 ‘덤의 시간’을 맞이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존경’이나 ‘존중’까지는 아니어도 ‘이해’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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