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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민함은 들키기가 싫어

그러다 소매치기당할 뻔했지

by 작사가 신효인


- 출근일: 월수금 (화목 휴무)
- 수요일 크리스마스
- 금월화수목금 어학원 방학


모든 이가 맞아, 이번 겨울 휴가(12/24~1/5)가 이례적으로 길었다.


지금 아니면 못 간다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내 형편에 사치인 것 같았다.

비행기 표를 검색해 봤다.


왕복 직항 표 123만 원


와우. 이건 싸게 해 줄 테니 그만 고민하고 가라는 신의 계시.


라고 멋대로 여겼다. 두 눈 꼭 감고 비행기 표를 끊어버렸다.


숙박비, 식비, 교통비 등 2주간의 여행 경비는 자금을 마련해서 충당하고 싶었다(모아둔 돈 건들지 않고). 계산해 보니, 남은 세 달 안에 저금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100만 원. 빠듯하다. 몰라, 가서 굶든가 어쩌든가. 분수에 맞게 놀자.


그런데 돈을 모으는 동안 축의금, 병원비 등 예상외 지출이 너무 많았다. 여권 재발급, 여행 물품 구매 등 여행 준비하는 데에도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흐억 흐억. 벅차다 벅차. 지금 받는 월급만으로는 다 감당하기가, 계획대로 저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일 알바를 시간 날 때마다 했다.


후아- 쉽지 않았지만 끝내 경비 마련 성공.

동생아, 언니 간다.


그렇게 이탈리아로 향했다.


.


일정 기간 동생의 집에 머무르고, 집에서 밥을 해 먹어 숙박비와 식비를 줄일 수 있었다.


동생이 한식 노래를 불러서 바리바리 싸갔다 (서프라이즈~)
동생이 늘 해줬던 저 샐러드 엄청 맛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계속 해먹는 중 (드레싱: 레몬즙+올리브유+소금+후추+알룰로스+ 발사믹)


그런데 연말에 한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파스타 한 그릇에 약 3만 원이 웬 말이야.


피렌체에 꼭 가려 했던 포토 스팟과 카페가 있었으나, 돈을 아끼려고 카페는 과감히 포기했다. 포토 스팟에서 사진을 다 찍고 가려는데 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냐, 이탈리아는 처음이냐, 피렌체에서 얼마나 머무냐 등등을 물었다. 수상한 느낌은 없었다. 책 <모모> 속 기기 아저씨만큼이나 말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그는 말동무가 생긴 것에, K-POP 팬인 자신 앞에 한국인이 나타난 것에 그저 행복해 보였다.


한 자리에 서서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몸이 사람들과 부대끼기 시작했다. 내가 사진 찍기 시작할 쯤부터 인파가 조금씩 늘어났던 터라, 그저 좀 더 복작해졌나 보다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편할 정도로 접촉이 잦아졌다.


난 감각이 무척 예민한 사람이다. 뭐든 남들보다 좀 더 빨리, 확실하게-크게 느낀다. 그래서 평소에 감각을 누르고 예민함을 감추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쓴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의 예민함을 상대가 인식하고 있는 것, 의식하는 것도 너무 편치 않고. '내가 예민한 거겠지'하고, 느껴지는 것들을 최대한 다스리거나 흘려보낸다. 타인을 통해 그간 보고 배운 '보통'을 벗어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신나서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도 불편한 접촉을 애써 무시하며 참았다. 그러다 왼쪽 옆구리 뒤쪽에서 위아래를 가르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느낌이 패딩 위로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내게 바짝 붙어 서있던 서너 명이 부리나케 흩어졌다. 내 팔과 옆구리 사이로 뒤쪽에서 가방 지퍼를 내려, 몸 앞의 가방에 손을 대려던 참이었다. 여러 번 치대도 반응이 없으니 내가 대화에 정신 팔린 애인 줄 알았나 보다. 아니거든요오-!!


나와 이야기 나누던 그는 도망가는 서너 명 중 하나를 말벌 잡는 아저씨처럼 쫓아갔다. 피융-


여행 브이로그에서만 보던 일을 실제로 겪다니. 가방을 뒤적여 분실물 없는 거 꼼꼼히 확인하고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 하나 잃어버렸으면 엄청난 책망을 스스로에게 했을 거다.


예사롭지 않은 불편함이 맞았다. 애써 무시할 게 아니었다. 여행지에서는 예민해도 됐는데, 앞의 사람을 너무 신경 썼다. 안 그래도 없는 살림 털릴 뻔했네!!


그나저나 이 분은 어디 가신 거지. 알고 보니 소매치기랑 한 패인 거 아니야..? 내가 너무 순수하게 미끼를 덥석 문 건가..?

흐음..


한참을 길에 멀뚱 거리며 서있었다.


가도 되나..? 자리가 끝난 건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지..? 소매치기 잡으러 가준 건데 돌아왔을 때 없으면.. 서운..하겠지..?


좀 더 기다려보았다. 머지않아 그가 헉헉대며 돌아왔다. 도둑에게 뭐 훔쳐갔냐고 따지니 자기도 소매치기 당했다고 했단다. 참 내. 어이없어.


잃어버린 거 없다고 고맙다고 하니, 그는 어디 들어가자고, 차나 커피를 자기가 사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사실 이미 대화를 꽤 오래 해서 이만 내 갈 길을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소매치기에 자기 일처럼 대응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대화가 갑작스레 파투 난 것에 대한 미안함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고 답했다.


그런데 그를 따라서 들어간 카페는.. 무려.. 내가 가고 싶었던 그 카페였다..! 심지어 안내받은 테이블은 내가 앉고 싶었던 그 자리였다..!!


세상에.. 쏘 럭키.. 쏘오- 럭키..


흥분을 어렵사리 감춘 채 차를 주문했다. 그는 저녁 약속이 있어 가봐야 한다며 찻값을 내주고서 떠났다. 추운 날에 밖에서 자기와 이야기하다가 소지품 도둑맞을 뻔한 나를 신경 써준 듯했다. 고마웠다. (찰나였지만 의심해서 미안해요. 하핳.)


남겨진 나는 좀 전까지 일어난 일련의 모든 일을 낭만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끝은 없었다. 경비 아끼려고 동선에서 뺀 카페를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이 덕분에, 소매치기 피해서 오게 되다니?! 심지어 앉고 싶었던 자리에 앉다니. 오마갓.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신기해. 행운과 운명을 논하며 한없이 신나 했다.


카모마일 차와 핫초코


참, 로마 지하철에서 동생과 생이별당했다.


로마 기관사님들은 지하철에 사람이 타고 있든, 유모차가 타고 있든 때가 되면 문을 그냥 닫아버리더라. 승하차 모니터가 안 되는 시스템인가 보다. 사람들 옷 끼이고, 가방 끼이고, 손 끼일 뻔하고.. 매번 너무 위험해서 속으로 소리를 몇 번을 질렀는지 모른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동생이 먼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에 올랐고, 이어 나도 발을 올렸는데 문이 닫혀왔다. 타고자 하면 몸이 문에 짜부라질 판이었고, 포기하면 동생과는 이별이었다. 순간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다. 발을 뺐다. 우주 최강 야물딱쟁이 동생은 내가 탑승을 포기하자마자 창문 너머에서 입을 벙긋대며 수신호를 보내왔다.


다음 역. 다음 역에서 만나.


무한 끄덕끄덕. 하필 여행 마지막 날이라, 데이터가 없어 폰이 무용지물이었다. 7분 정도 기다렸다가 열차에 몸을 실었다.


츠킁 츠킁. 츠킁 츠킁.


다음역(B)에 도착했는데 동생이 없다..!!

헐 뭐야. 뭐야.


재회 순간을 담으려는데 동생이 없어서 당황한 앵글


다른 출입문으로 들어오나? 열차에 몸을 실은 채로, 승강장과 지하철 내부를 번갈아 확인하며 동생의 존재를 확인했다. 동생은 없었다.


어쩌지. 이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려? 말어?


안 내렸다. 내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열차 문이 닫히고, 곧이어 출발했다. 심장이 두근댔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동생이 역에서 내리고서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동생이 못 내렸나? 아닌가? B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엇갈린 건가? B에서 내렸어야 했나? 뭐지?


이다음 역(C)에 도착하기 전에 내 거취를 정해야 했다. 침착하게 생각을 해봤다. 느낌에 동생이 내 뒤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날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로 B에서 못 내린 것 같다. 엇갈린 거라면, 목적지 역까지 일단 가자. 목적지역에 가서 어떻게든 연락을 해보자. 거기서 만나면 되지. 동생도 엇갈렸다고 판단되면,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 감과 똑순이 동생을 믿고, C에서 내리지 않고 목적지 역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침착 침착.


이렇게 적으니 참 별일 아닌데, 그때는 꽤나 심란했다. 소중한 내 동생, 내가 지켜줘야-챙겨야 되는 애(라고 늘 생각하는 맏이)를 타지에서 잃어버려서 달달달.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심각한 동생 바보. 이제는 동생도 다 컸는데 말이지.


C에 도착하자마자 혹시 여기 있을까 싶어 눈을 빠르게 굴렸다.


찾았다!!


서로를 창문 너머로 발견하자마자 둘 다 눈이 최대치로 커지며 얼굴이 밝아졌다. 똑순이도 꽤나 걱정하셨나 보다. 반갑 반갑. 히히.


동생 말로는, B에서 열차 문이 안 열렸다고 한다. 그래서 B에서 못 내리고 C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로디는 다다음역(C). 내게 제때 닿지 못했던 카톡.


동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여행에서 그 애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봤다. 다 큰 성인이어도 내 눈에 동생은 여전히 아기인데, 아기가 언니 노릇을 하더이다.


기차로 아시시에 가는 날이었는데, 동생이 작은 도시락 가방에 귤, 과자 등 간식을 챙겼더라. 나는 내 외출 준비 하나도 바삐 허덕이며 했는데 말이지. 옆에 앉아서 가만가만 귤을 까서 내 입에 넣어주는데, 행복했다.


행복해서 찰칵 / 귀여워서 찰칵


가끔 어릴 때처럼 내게 앵-앵- 어리광 부리거나 유치한 장난을 칠 때가 있긴 한데(좋음)


풍경 찍으려는데 같이 찍으라며 앵글에 자꾸 플레이브를 넣어주시거나 / 기차 찍고 있는데 옆에서 둠칫탓칫 춤을 추시거나


평소 동생은 무척 무뚝뚝한 편이다. 다정하게 굴어달라고 내가 종종 투덜대곤 한다. 그런데 몰랑한 나와 결이 다를 뿐, 요란스럽지 않아 티가 많이 나지 않을 뿐, 동생도 참 다정한 사람이더라.


이탈리아에 도착한 날. 집에 왔을 즈음 내가 배고파 할 거라는 생각에 동생은 카레를 미리 해놓고 날 데리러 왔다. 장 보고, 재료 손질하고, 입에 맞을까 고민하며 요리했을 거잖아. 하나 있는 햇반도 안 먹고 아껴둔 것일 거고. 크리스마스이브니까 기분 내자며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도 꺼내왔다. 이건 또 언제 샀디야.. 감동..


카레 엄청 맛있었다


추워하는 날 위해 자기 목도리를 턱턱 감아주고, 다음 외출 땐 핫팩을 챙겨줬다. 바람이 꽤 춥게 느껴지더니 여행 4일 차쯤 목이 많이 칼칼했다. 약 먹는 거 안 좋아해서 미련하게 버티며 몸빵 하는 스타일인데, 동생이 가습기를 틀어주고 꼬박꼬박 아침저녁 약을 챙겨줬다. 덕분에 크게 안 아프고 열흘을 햅삐-하게 잘 놀았다. 원래 같았음 며칠 목 아프고서 코 꽉 막히고, 열 나서 고생했을 텐데.


짱아가 마련해 준 요양 환경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맛집을 찾아봐주고 데려가줬다. 요리도 여러 가지 해주고, 언니 생일이라고 레스토랑 가서 밥도 사주고. 길 가다 사진 찍는다고 내가 우뚝 서면, 다 찍을 때까지 늘 기다려줬다. 백 번이면 백 번 다.


동생을 늘 챙기는 입장이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챙김을 많이 받았다. 동생의 조용한 다정함, 행동력이 강한 다정함을 순간순간 많이 느꼈다.


맛집 하니까, 까르보나라 또 먹고 싶다.


이탈리아 까르보나라 파스타는 크림이 안 들어가고 계란과 치즈로만 맛을 낸다는데, 정-말 맛있었다. 먹고, 다음날 또 먹고, 다다음날 또 먹었다. 이탈리아 거주인인 짱아는 파스타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까르보나라 노래 부르는 내가 가자는 대로 다 가줬다. 하지만 식당 가서 가지 그라탕을 보며 '곱창 전골 맛있겠다.',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보며 '해물 칼국수 맛있겠다.'를 중얼댔던 그녀 허허허.


올리브유 뿌리고 100배 맛있어졌던 식전 빵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크로와상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태어나서 먹어본 크로와상 중에 제일 풍미 좋고 바삭했다. 솔방울을 씹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그런 식감이었다. 커피를 안 마셔서 티라미수를 안 좋아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티라미수에 눈을 떴다. 은은한 커피 향과 부드러운 크림의 조화가 최고였다. 크림빵들도 크림이 진하고 무거워 정말 맛있었다. 훌륭한 맛.. 이탈리아에서 여러 디저트를 맛보며 행복했던 진성 빵순이.


괴물 사진 아니고 인생 최고 피스타치오 크로와상. 바삭함의 끝.
페루쟈 시장에서 사먹었던 프레첼. 엄청 쫀득해서 맛있었다.


참, 이탈리아 사람들이 내 폰(삼성 플립-폴더블 폰)을 엄청 신기해했다.



어디 거냐, 얼마냐, 써보니 어떻냐 여러 명이 물어봤다. 생각해 보니, 이탈리아에서 삼성폰 쓰는 사람을 꽤 봤는데, 그중에 플립이나 폴드를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럽에는 홍보나 판매를 안 하나..? (잘 모름) 레스토랑 직원은 구경해 봐도 되냐고 묻더라. 폰을 건네줬더니 무척 신기해하며 몇 차례 접었다 폈다 했다. (이때 호옥-시 폰 가지고 튀면 바로 쫓아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 떼고 있었다..ㅎ) 폰에 대한 관심, 질문받을 때마다 폰 좋다고 적극 홍보했다(쁘이v).


짱아야 빠이 빠이 언니 간다


이번이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이었음에도 마치 첫 방문 같았다. 학창 시절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여행을 길게 다녀온 적이 있는데, 어른들이 가자는 대로 다녔던 여행이라 기억에 크게 남는 게 없다. 스위스 풍경이 정말 예뻤던 거랑, 처음 보는 비데 변기가 신기했던 거랑, 달팽이 요리를 먹으며 '달팽이와 골뱅이는 식감이 같구나.' 했던 것 정도..?


그와 달리 이번 여행은 소중하게 다 기억에 남아있다. 내 의지로 여행 요소 하나하나 고르고, 다니고, 맛봐서 그런가 보다. 동생과 오래 시간을 함께 보낸 것도 좋았다. 출발 전까지 갈까 취소할까 고민을 깊게 했었는데, 다녀오길 참 잘했다. 친구가 파리 빵도 진-짜 맛있다고 다음에는 자기랑 프랑스 여행을 가자는데, 기회가 되면 꼭 다녀와야겠다.


정말 오랜만의 여행은 낭만을 일깨워줬고, 그 낭만은 다음을 꿈꾸게 해 주었다.



- 이탈리아 여행기 끝 -




안녕하세요. 작사가 신효인입니다.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탈리아 여행기를 적어보았어요.


한 독자분의 '새로운 곳에서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는 댓글 덕분에 이 글이 나오게 되었어요. 남겨주시는 좋아요와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잘 보고 있어요. 한 자, 한 자 진하게 눈 맞춰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답니다. 작가에게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게 정말 큰 기쁨이거든요. 응원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어요.


설 연휴 건강하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자 하시는 일 올해 다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요.


고맙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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