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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속 이야기를 하지 않는 어른으로 컸다

상처를 행복으로 기워주는 사람들

by 작사가 신효인


나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을 때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걸 좋아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곰돌이 쿠션을 내 배와 책상 사이에 두고 있다. 이러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어서 좋다. 집중이 잘 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너는 왜 항상 가방을 끌어안고 있어! 왜! 집에 가게?!


민망했다. 아이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는 것도, 선생님의 고함도 싫었다. 말없이 가방을 책상 옆 고리에 걸었다. 다리에 자꾸 닿는 가방이 불편했다. 배 앞이 허전한 게 싫었다. 상황이 여러모로 날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집에 가서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속상하면 되지. 당시에 '혼이 났다'라고 느꼈기에, 혼난 걸 부모님께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속상한 걸 말하는 게, 선생님이 나쁘다고 욕하는 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내 편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았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생각이 많고, 공감 능력이 높은 아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는 속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어른으로 컸다. 그 기질을 그대로 가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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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일이 아닌 저녁 8시경, 내가 영어 수업을 맡고 있는 6세 A의 어머니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께서는 대뜸 '혹시 수업 시간에 아이 머리를 때리셨나요? 아이가 그랬다고 어제, 오늘 이야기를 해서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물으셨다.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했다. 큰일이 났다고 느꼈다. 억울했다. 오해받는 게 싫었다. 안 한 걸 안 했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안 한 걸 안 했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이 상황이 너무 어렵고 무겁게 느껴졌다. 나를 지키면서도,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는 이 상황에서 힘이 없다. 설득력이 있는 반박이 필요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 않은 걸, 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해명을 해야 하나. 손이 떨렸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력함이 느껴졌다.

우선 아이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는지 어머니께 물어봤다. 어머니께서는 아는 게 없으셨다. 전화가 연결된 채로 아이를 불러다 물어보셨다. 어머니께서 전해주시는 상황을 아무리 들어도 내 머릿속에 특정되는 장면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 전의 '머리를 때렸다'는 표현은 '머리를 밀치거나 꿀밤을 때렸다'로 바뀌었다. 표현이 가벼워진 것이 나를 편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나는 머리에 손을 댄 적도, 꿀밤을 때린 적도 없다. 절대 그러지 않는다. 결국 스피커폰으로 돌려 전화로 삼자대면을 했다. 아이는 '이렇게 바닥에 앉았을 때 내가 선생님이 좋아서 선생님 옆에 앉았는데 선생님이 뒤로 가라면서 손바닥이 머리에 이렇게 했어.'라고 했다. 알겠다. 무슨 상황을 말하는지는 알겠다.

전날 수업 시간이었다. 계속 의자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건 6세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10분에 한 번씩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책 읽기 활동'을 자리를 옮겨서, 바닥에 아빠 다리로 앉아서 진행한다. 내 앞쪽으로 아이들을 동그랗게 앉히고, 아이들이 책을 볼 수 있게 책을 펼쳐 들고서 이야기를 읽어준다. 아이가 내 바로 옆에 앉으면, 그 아이는 책을 볼 수 없다. 각도 상 그렇고, 내 몸에 가리기도 하고. 그래서 내 옆에 쪼르르 앉은 아이들에게 뒤쪽(책 맞은편)으로 가서 앉으라고 지도했다. 그 지도를 받은 아이들 중 하나가 A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체 접촉은 없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확실히 알게 되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고도 할 말이 생겼다. 억울함과 속상함에 몸과 말에 힘이 들어가려는 게 느껴졌다. 나의 결백을 완벽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 속이 편할까? 거짓말쟁이가 될 아이가 눈에 밟혔다. 통화로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난 뒤라, 쉬이 물러졌다.

나의 결백을 밝히는 데에 힘을 쏟기보다는, '아이가 왜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 번도 아니고 어제, 오늘 이틀 연속으로 했을까?'에 집중해 보았다. A는 본인 맘에 드는 반응을 상대가 해줄 때까지, 의사 표현을 하는 아이이다. 어디가 아프다, 쟤가 어쨌다, 뭐가 불편하다 등에 충분한 액션을 취해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게 달라붙어서 계속 이야기를 한다. 리액션을 적당히 해줘서는 떼낼 수 없다. 특유의 그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와야 비로소 끝이 난다.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버거울 때가 많다. 아이는 아마도 엄마에게서 원하는 크기의 리액션을 얻고 싶어서, '선생님 옆에 앉고 싶었는데 못 앉게 해서 속상했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휴우..

이런 점을 고려해서 어머니의 민망함을 키우지 않기 위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말을 고르고 골라 해명 아닌 해명과 설명과, 아이 입장 대변을 했다. '어머니께서 무슨 마음으로 전화하셨을지 알겠다'며 공감까지 전했다. 너무 힘들었다. '아이가 거짓말한 거예요. 수업 때 이러해서 저를 버겁게 만들어요. 오늘 이 통화는 제게 너무 상처가 되었어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합니다.'라고 그냥 내뱉고 싶은 맘도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일을 심각하게 만들려고 전화했던 건 아니고 오해 안 하고 싶어서 물어본 거라며, 아이와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고 전화했어야 했는데 너무 다짜고짜 물어봤던 것 같다고, 자기가 T라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그에 나는 파워 F임을 밝히며 내 심정을 돌려 전했다. 사과는 듣지 못했다. 일이 이만하게 해결되어 다행인 걸 위안 삼아야 했다.

선생님들께서 수업 사진과 영상을 3주에 한 번씩 부모님들이 가입해 계시는 커뮤니티에 올린다. 마침 이번 주가 내 차례라 '책 읽기 활동'을 촬영해 둔 게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영상을 돌려보았다. 역시나 뒤로 가라고 지도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이 머리에 손을 댄 일은 없었다. 교통 정리 하듯이 허공에 팔을 휘적대는 나만 있었을 뿐. 그리고 그때 내가 정말 아이를 때렸으면, 꿀밤을 먹였으면, 손바닥으로 머리를 밀었으면 다른 아이들이 보고 놀랐을 거다. 아이들은 전부 내가 읽어주는 이야기에 잘 집중했고, 흥미로워하며 들었다. 그리고 그날 A는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면서 나에게 하트를 스무 번이나 날리고 갔었다. 그래놓고.. 뭐지 이게 진짜.

통화가 끝나고 많은 것들이 밀려와 힘들었다. 감정적인 소모가 너무 컸다. 무너지고 싶었다.

교수 부장님께 이 일을 보고 해야 하는데 망설여졌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고 또 해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그리고 소란이 일어난 것이, 이런 오해가 생긴 것 자체가 나의 부족함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걸 드러내 보이는 것 자체가 곤욕스럽게 느껴졌다. 부장님께 말하면 원장님께, 아이 담임 선생님께도, 6세 부장 선생님께도 다 전달될 테니까. 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숨길 수는 없었다. 한편, 부장님께 말씀드려서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어머니께서 실수하셨네.
지금 '앗차'하고 계실 거야.


부장님이 건네주신 두 문장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아이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아예 없는 말을 했겠어? 평소에 뭐가 있었나 보지.' 해버리면 답이 안 나오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부장님께서 저렇게 말씀해 주시니 '내 편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됐다.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될 내일을 견딜 힘이 조금 생겼다.

다음 날 보충 수업 때문에 6세 층에 갔다가, A를 마주쳤다. 안아달라는 듯 두 손을 뻗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웃어주지도,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게 또 지금껏 맘에 걸린다. 아이가 뭐 복잡하게 생각하고서 그렇게 했을 거라고. 그런 거 아닌 거 아는데, 머리 따로 몸 따로 놀았다. 앞으로 아이를 볼 때마다 통화가 생각날 것 같아 걱정이다. 부모님들께 매 달에 한 번 수업 진행 상황과 아이의 학업 성취도를 안내드리기 위해 전화 상담을 드리는데, 다음 달에 A 어머니께 전화 상담 드릴 것 생각하면 벌써 도망가고 싶다. 바닥에 앉아 책 읽어주기도 하기 싫어졌다. 어쩌지. 언제쯤 괜찮아질까. 내일 출근하기 싫다. 아이들 만날 생각에 신나서 일찍 출근하던 내가,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엄청 재밌어하겠지?'하고 설레어하며 수업 준비 하던 내가 시들어버렸다.

이 일을 나 자신이 트라우마라고 여기게 두고 싶지는 않은데, 글을 쓰면서 내 컨디션을 보아하니 이미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시인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보다, 안 한 걸 안 했다고 해명해야 할 때 느끼는 무력감의 크기가 더 크다는 걸 이번에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강력한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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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가까운 이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아무도 모른다.


일 당장 그만둘 거 아니니까 이렇다 할 해결책이 있는 문제가 아님 -> 말하면 말하는 동안 또 화날 것 같아 -> 듣는 사람도 속상해 -> 대화에 남는 게 부정적인 것 밖에 없잖아. -> 혼자 감당하자.


생각이 이렇게 흐른다. 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는 잘 하지 않는다. 열 뻗친 상태에서 10 페이지인 마음을 말 한 문장에 잘 담아낼 자신도 없다. 안 그래도 말이 서툰데. 그렇다고 정리도 안 된 걸 줄줄줄 끌고 나와서 듣는 사람 지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부장님께 말했을 때도 1/10 밖에 말 못 했다. 그마저도 횡설수설했다. 그렇게 바보처럼 말하고 나면, 자괴감이 든다. 생각은 많고, 말은 서툴고, 타인 민감도는 높고, 감수성은 예민하고, 공감 능력은 강하고.. 여러모로 속마음 말하는 게-특히 부정적인 이야기 하는 게 참 어려운 편이다.

얼굴에 열을 올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감정을 쏟아내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내게 더 도움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극복할 힘이 생긴달까. 좋아하는 사람이랑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카페 가서 수다 떨고, 좋은 날씨 느끼고, 드라이브하고, 카메라 타이머 맞춰놓고 뛰어가는 중간에 찍힌 사진 보고 깔깔대고. 그러다 보면 살아갈 기운이 난다.

그리고 그들의 날 아껴주고, 소중하게 대해주는 언행에서 '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해서 받은 상처'가 치유된다. 집에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것, 내가 좋아하는 빵이나 꽃을 서프라이즈로 사 와서 건네주는 것, 뭐 먹고 싶냐고 물어봐주는 것, 오늘은 자기가 사겠다며 카운터에서 카드를 건네는 것,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내 모습을 몰래 찍고 있는 것, 여행 가자고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봐주는 것 등. 평소에, 늘, 항상 이렇게 날 귀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잘못했음'을 가슴으로 느낀다. 그렇게 치유가 된다. 내가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아도, '그 사람이 잘못했네.'라고 듣지 않아도.

그렇게 상처 입은 마음이 서서히 정리되어 괜찮아지면, 희한하게 그 타이밍에 꼭 말할 기회가 생긴다. 약속이 잡혀서 수다를 떨거나,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가 조언을 구하거나 등등. 그런 경우에는 말하는 나도, 듣는 상대도 버겁지 않은 컨디션으로 잘 말한다.

100% 모든 경우에 이렇게 감정 처리를 하는 건 아니다. 완전히 무너졌을 때는 손을 뻗는다. 이번에 겪은 일은 꽤 힘든 일이었는데, 부장님께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했고 힘과 위로가 되는 말을 들은 덕분에 끙끙대고 있긴 해도 버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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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동생이랑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가야 되는데 평소 하던 대로 했음에도 머리가 잘 안 됐다. 심히 맘에 안 들었다. 옆에 있던 동생이 '내가 해줄게' 하더니, 예쁘게 땋아줬다. 머리 하느라 계획보다 조금 늦게 카페에 도착했다. 시간대 별 선착순 입장이라 동생이 앉고 싶어 했던 자리에 못 앉게 되었는데, 동생은 괜찮다고 했다. 동생이랑 카페에서 즐겁게 시간 보내고, 집에 와서 동생이 사준 떡볶이를 먹었다. 밤에는 동생이 나를 엎어놓고 내 전신 위를 한참 걸었다. 시원~~ 기분 좋은 밟히기 ㅋ_ㅋ 동생이 너무 가볍다. 맛있는 거 해 먹여야겠다.

동생 덕분에 힘이 나서 오늘 이렇게 내 이야기를 적을 수 있었다. 상처를 행복으로 기우며, 또 살아간다.


내일 출근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충전된 힘으로 잘 해내봐야겠다. 아자.

우리 모두 화이티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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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일기 끝 -



* AI 학습 데이터로 글 활용 금지




+250605(목)

이 글을 올리고 며칠 뒤, 친구 나나에게 불려 나갔다. 오후에 카페에서 만나 각자 일하고, 저녁에 소래포구에 회를 먹으러 다녀왔다. 말 안 하는 게 낫다던 나는 막히는 길 위에서 한 시간을 떠들었다. 잘 들어주던 나나는 '이렇게 말을 해야 돼! 그래야 풀려! 알았지.'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괜찮아졌다. 상황이 바뀐 건 하나도 없는데, 내가 견디고 있던 일들이 가벼워졌다. 대단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보다 더 대단한 일 나나가 만들어주어서.


출근할 힘이 다!


고마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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