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야, 5년 차. 너 직장 그만둘래 말래.

애매하긴 해.

by 작사가 신효인


.

근무 1년 차 2021년 2월
정체성이자 꿈인 '작가'를 내 삶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히키코모리 생활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일자리를 찾았고, 평일 오후 4시간 동안 유치원 및 어학원 차량 동승 일을 하게 되었다. 근무 시간 동안 차량 동승 일 외에도 크고 작은 행정 업무를 도왔다. 부장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터라, 기쁘게 열심히 했었다.

.

근무 3년 차 2023년 12월
원장님께서 어학원 매니지먼트를 정식으로 부탁하며 월급 인상을 약속하셨다. 나의 노고와 능력을 인정받아서 기뻤다.

.

근무 4년 차 2024년 3월
월급 인상 약속이 갑자기 파기되었다. 운영비 사정에 의해서였다. 근무일수도 5일에서 3일로 줄었다. 월급이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다른 일도 잘할 수 있다고, 다른 일 도울 거 없겠냐고 여쭤봤다. 서운하고, 슬펐다. 불안했다. 차량 동승 일만으로는 안 되겠구나. 밥벌이, 내 살 길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2024년 5월

원장님께서 유치원으로 부르셨다. 와서 학부모 공개수업 한 번 보라고. 영어 강사 자리를 또 권하시는 거다. 가서 보니, 파워 내향인인 나는 절대 못할 일이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저렇게 못 한다고 질색팔색하며 도망갔고, 부장님께서는 그런 내 팔을 붙잡으며 이야기 좀 하자고 난리였다.


2024년 9월
한 곳에 고여있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6개월을 지내보니 20대에 수입이 적은 것과, 30대에 수업이 적은 건 달랐다. 마음이 바뀌어서, 영어 강사 연수를 받았다. 생존 욕구는 평생 안 할 것 같았던 일을 도전하게 만들었다.

.

근무 5년 차 2025년 3월
유치원 및 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차량 동승 일도 계속하고, 작년처럼 월수금 3일 출근. 새로운 직무를 맡게 되어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맡은 직무와 근무 시간이 늘어서 급여가 올랐다. 기뻤다.


2025년 8월
원장님으로부터 1:1 면담 요청이 왔다. 학기 중에는 이런 일이 잘 없는데. 무슨 일이지.

원장님께서는 9월부터 근무하기로 했던 새로운 부장님이 못 오게 되었다며, 나보고 부장님 대리로-실장으로 어학원 매니지먼트 업무를 봐달라고 하셨다. 다시 화목에도 출근을 해달라고. 원장님 손으로 구겨져서 휴지통에 들어갔던 약속이 다시 꺼내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잔뜩 꼬깃꼬깃 해진 그 약속.

내게는 돈벌이-밥줄-생사가 걸린 일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휴지통에 들어갔다가, 중요 문서함에 들어갔다가 한다. 머리로는 받아들인 현실이지만, 반복될 때마다 늘 당혹스럽고 아프고 서운하다.

안 된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안 된다. 작년부터 내 삶의 나머지는 '월수금 3일 출근'에 맞춰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언제 또 흔들릴지 모른다. 나머지를 내던지고 내 삶을 다시 이곳에만 걸 순 없다.

상사에게 계속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건 참 고역이다. 그것도 듣는 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으으. 어려워. 이 거절이 나에게 어떤 부메랑이 되어 올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휘둘리게 둘 수는 없었다.


2025년 9월
일을 보러 유치원 사무실에 들렀다.

원장님께서 마침 할 말이 있었다며, 나를 자리로 부르셨다.

원장님은 내게 2학기 학부모 공개수업 일부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계약할 때, 공개수업은 직무에 없는 걸로 확인을 받았었다. 이건 약속과 다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귀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열흘을 후회했다. '내가 왜 한다고 했지' 하고.

엎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다. 하기로 한 거, 아주 끝내주게 잘해버려야지.


2025년 10월
부장님께서 영어 이야기 읽기 콘테스트 안내문을 주셨다. 아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아이들이 잘할 수 있도록 수업 마지막에 스토리를 읽어주고 집에 보내라는 원장님의 지시도 전달받았다.

그 순간 짜증과 화가 세게 솟구쳐 올랐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이것까지 하라고?!


2025년 11월
다섯 번째 수업이 끝난 뒤, 혼이 나갔다. 고요하게 쉬고 싶은 욕구가 격렬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바로 차량 동승을 하러 나가야 했고, 다녀와서는 학부모 전화 상담을 해야 했다. 커뮤니티에 수업 영상과 사진도 올려야 했다. 공개수업 교안도 수정해야 했고 교구도 만들어야 했다. 할 게 많았다.

핸드폰 화면에는 수업하는 동안 온 학부모님의 연락이 쌓여있었다. 확인해 보니, 서둘러 차량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2교시 등원 차량 출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빨리 답장 보내고 나가야 해.

가방과 외투를 품에 대충 끌어안고, 카운터에 앉아서 문자를 쳤다. 그런데 어디에서 무언가 구워지는 냄새가 났다.


뭐지? 이게 무슨 냄새지? 일단 답장 빨리 보내. 얼른. 이것도.


마지막 전송 버튼을 누르고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내 옷이었다. 끌어안고 있었던 내 외투 소매 끝이 카운터 바닥에 놓여있던 난로에 닿았던 것이었다. 좋아하는 옷이 녹아버렸다.


펑!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들었다. 속상해서 울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어서, 예쁘게 녹았다고 자기 세뇌를 시켰다.



그러다 또 울분이 치밀었다. 탓할 대상을 찾고 싶었다. 일하다 그런 거니까 원에서 보상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과실인데 누굴 탓해.

최근 일터에서 감정이 너무 쉽게 요동친다.


아, 내가 지쳤구나.


지쳤다. 많은 업무에도 지쳤고, 계속되는 상사와의 옥신각신에도 지쳤다. 지쳐서 별 거 아닌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자극을 주는 사람이 쉽게 미운 거다.

스토리 한 번 읽어주는 거 뭐 별 거 아닌데
옷이 난로에 닿아 녹을 수도 있는 건데

지친다. 물컵에 물이 가득 담긴 것 같다. 넘칠 듯 말 듯하다.


.

공개수업 때문에 이번주는 5일 다 출근을 해야 한다. 추가 근무에 대한 페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얼마 받고 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건.. 꽤나 답답하다. 제안을 수락하기 전에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때 옥신각신을 길게 한 상태에서 끝에 돈을 따지고 드는 모양새까지 더해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못했다. 그 뒤로는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어서 못 물어봤다. 찜찜함을 두 달 동안 품었다. 피곤하다.


.

하아.. 힘들다. 내가 나약한 걸까? 내가 일일이 너무 크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는 거고, 저럴 수도 있는 거고. 또 필요에 의해 버림받을까 봐 겁나는 건가? 지속적으로 여러 제안을 받는 건 좋은 일인데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이는 곳이 많은 것에 비해 대우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가? 단지 성향이 안 맞아서 그런가? 아니면, 상사와의 대화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 건가? 너무 소심하고, 조심스러운가? 난 역시 사회생활에 적합한 스타일이 아닌가. 너무 자기 비하/혐오인가? 모르겠다. 다 모르겠고, 그저 지치고 힘들다.


그만두고 싶다


12월에 재계약 면담을 앞두고 있어서 머릿속이 더 복잡하다. 내년에 1년 더 할 자신은 절대 없는데, 수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대책도 없다.


.

> 얼마 전에 은행 어플에서 체크카드를 만드는데, 직장 이름과 주소 및 연락처를 물어보더라. 일을 그만두면 이럴 때 써낼 수 있는 게 없어지겠지. 사고 싶은 것도 있고, 배우고 싶은 것도 있는데 일을 그만두면 전부 나에게서 멀어지겠지. 저축을 더 하기는커녕, 모아놓은 거 까먹기만 하겠지.

> 지금은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질식할 것 같지만, 일을 그만두면 한두 달 좋고 금방 돈 없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하겠지.

> 그렇지만 그만두고 싶어. 글에 좀 더 에너지를 쏟고 싶어. 지금 사실 주객전도 되어 있기는 해. 글 쓰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글 보다 여기에 에너지를 더 쓰고 있어.

> 안정적인 기반 없이 내가 글에 잘 집중할 수 있을까?

> 여길 벗어나서 다른 환경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른 알바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 아닌가. 이래서 도망가고, 저래서 도망가면 뭘 할 수 있겠어! 버텨볼까. 내가 더 버틸 수 있나 테스트해 볼까. 알바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인데. 4대 보험도 되고.

> 아닌가 꼭 그렇게 안정적이지도 않은가. 원장님이 또 흔드실 수도 있겠지.

> 나중에 나이 먹으면 그만두기 더 힘들지 않을까. 그만둘 수 있을 때, 무언가 다시 시작하기 어렵지 않은 나이일 때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평생 업으로 삼을 것도 아닌데. 엄마 아빠 더 나이 드시기 전에 일 그만두고, 같이 여행도 가면 좋지 않을까.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중에 시간 여유 생기면 하고 미루다가 엄마 아빠 다 노쇠해지셔서 후회하면 어쩌지.

> 효도도 돈이 있어야 하지. 그만둘 수 있는 핑계는 수백 가지네. 이래서 그만두고, 저래서 그만두면 뭘 할 수 있지. 1년만 더 버텨보면 어떨까. 그때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이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 버틸까. 아이들만 바라보고 버텨볼까.

> 근데.. 이걸 1년 더 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데..

> 으아악! 어쩌지.

.


믿고 의지했던 부장님도 떠나셨고, 버팀목인 친구 선생님 엠마도 곧 일을 그만둔다. 내년에 외로이 잘 견딜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 어떻게 해야 되냐고. 알려달라고.

그런데 그거는 또 무슨 의미가 있나. 누가 그만두라고 하면 시원하게 그만둘 거고, 누가 계속 다니라고 하면 쿨하게 단념하고 계속 다닐 건가? 생각해 보면 그건 또 아니다. 그만두고서 내 기반이 다 무너지면 누굴 탓할 것이며, 계속 다니면서 내 몸과 마음이 죽으면 그건 또 누굴 탓할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답은 내가 세워야 한다.

나는 왜 두려운가? 무엇이 두려운가?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두렵구나. 어떤 선택을 내리고서 밀려올 여파가 두렵구나. 너무 힘들까 봐 걱정이 되는구나.

어쩌면 나는 스스로를 너무 나약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일을 계속하는 걸 선택하고서 겪을 고충, 일을 그만두는 걸 선택하고서 겪을 고충까지도 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선택하든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소중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지금껏 그래왔잖아.


일단 당장 있는 공개수업 잘해보자.

한 주, 한 주 해야 되는 거 하고 때 되어서 다시 보자.


다음 달 재계약 면담은 과연 어떻게 될까.




+

내 고민을 읽고 엠마가 보내준 메세지


진짜 솔직하게 너무 힘들고 지치는데 계속 끌고 가는 것도 난 미련하다고 생각해.. 한 달 만이라도 쉬고 다시 시작해도 돼. 언젠가는 그만둘 일이고, 내 평생 업으로 가져갈 일이 아니면 나는 지쳤을 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쉬어가도 된다고 생각해. 왜 에너지 드링크도 미래 나의 에너지 끌어 쓰는 거잖아. 노아의 에너지를 노아가 평생 업으로 할 일이 아닌 거에 끌어 쓰지 않으면 좋겠어. 내가 노아 입장이 아니어서 편하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지치고 힘든데 억지로 끌고 갔다가 내년에 '아, 그때 그만 둘 걸. 아, 스트레스야. 아, 너무 힘들어.' 이럴까 봐..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할까 봐 그게 걱정이지. 그냥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고, 한두 달 정도 쉬면서 다른 일 구해도 되니까.. 그리고 남들도 다 힘들다고 느끼는 거지 나약한 건 무슨~~~ 나약한 건 아무 생각 안 하는 게 젤 나약한 거야. 책임감도 있고, 걱정도 하는 노아는 나약한 게 아니라구. 2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해. 수입이 없어지는 거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가질 수 있어. 그런데 정말 극한으로 몰고 가서, 그만두고 이후에 이도저도 다 안 됐고, 못 됐다고 치자. 나이도 젊고 건강한데 무슨 일을 못하겠냐구. 그게 재산이야. 이걸 생각하면 용기가 나지 않을까? 지쳤을 때 그만두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도 사실 대단한 거라. 내가 지켜본 노아는 절대 나약하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은 버리고, 그냥 한 번쯤은 흐르는 대로~~ 맡겨 봐봐.


고마워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작사가 부업 #2: 영어 교육 실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