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무뚝뚝 인간 대회>가 있다면 단연코 1등은 우리 아바이 동무일 것이다. 딸을 아끼는 아버지들을 보고 언제부턴가 ‘딸 바보’라 칭하는데 아마 우리 아빠에게 그런 비슷한 별명을 지어준다면 ‘딸 천재’, ‘딸 마스터’쯤은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다정한 말 한마디 자식들에게 해준 적이 없었다. 가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면 호탕하게 웃으면서 우리들 볼에 거친 수염을 비벼대는 게 다였다. 그래도 그런 아빠와 살았던 오랜 시간이 사막의 선인장처럼 삭막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내 기억 어느 구석진 자리에 오아시스처럼 소중한 아빠와의 추억 하나가 보관되어 있었다. 바다처럼 넓은 아빠의 등에 업혔던 어느 날 밤 이야기이다.
어릴 때 우리 옆집에 동갑 내기 진주가 살았다. 나와 잘 어울려 노는 친구였는데 부모님이 아래 시장에 중국집을 열고 그 위층에 살 집을 마련하면서 골목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아쉬워하는 나를 가끔씩 진주네 중국집에 데리고 가 맛있는 짜장면도 사주시고 위층에서 진주와 놀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해 주셨다.
그날은 엄마를 따라 아래 시장에 장을 보러 간 날이었다. 문득 진주 생각이 나 중국집에 가보자고 했더니 엄마가 그럼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앉아서 두 젓가락이나 먹었나, 난 진주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 엄마도 잊은 채 신나게 놀았다. 내가 집에 갈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엄마는 하룻밤 이곳에서 자고 와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너무 신났다. 하루 종일 인형 놀이도 하고 진주 아빠가 올려주신 탕수육도 먹고 진주 방에서 춤도 추고 놀았다. 진이 다 빠질 만큼 놀고 나서야 꽤 늦은 밤이 됐다는 걸 알았다. 아줌마가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주셔서 나와 진주는 내복 차림으로 이불 속에 쏙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상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빼꼼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현관문을 열고 작업복을 입은 아빠가 들어왔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나를 향해
"이 시간에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라고 소리치더니 어서 옷을 입으라고 재촉했다. 내복 위에 주섬주섬 옷을 껴입었다. 아빠를 따라 중국집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무뚝뚝한 아빠가 날 데리러 왔다는 게 의아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기분이 설레기도 한 것이다.
쫄래쫄래 아빠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 나를 쳐다보며 아빠는 또 한 번 놀라운 말을 뱉었다.
"업어줄까?"
어린 나에게도 그 말이 무척 생소하고 어색했나보다. 얼떨결에 업히긴 했는데 고개를 등에 딱 붙이지 못하고 한참을 말 탄 자세로 어정쩡하게 업혀갔다. 막상 딸을 업으니까 아빠도 기분이 이상했던지 평소의 무뚝뚝한 말투가 갑자기 다정한 말투로 변했다.
“집에 갔는데 네가 없는 거야. 아빠가 밥도 안 먹고 옷도 안 갈아입고 너 데리러 여기까지 걸어왔어. 앞으로는 남의 집에서 자면 안 돼. 알겠지?”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랑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나는 진짜 어린아이가 되어 아빠의 등에 한껏 기댔다. 작업복에서 은은하게 기름 냄새가 났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