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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Dec 30. 2016

순정만화(5)

미술시간에만 쓰고 붓을 돌려주겠다던 

승현은 오지 않았다. 

나는 마침 주번이기도 해서 늦게까지 승현을 기다렸다. 

아니, 승현을 기다렸다기 보다는 

승현이 들고 올 내 붓과 먹물을 기다린 거였다. 

정말이다. 


청소 당번도 다 돌아갔고, 부산하게 나부끼던 커텐도 묶어 정리했다. 

하루 종일 흰 가루를 날리던 칠판도 지금은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하다하다 창틀에 낀 먼지까지 다 닦아냈는데도 승현은 오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괜히 나 혼자만 기다린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나쁘다. 너무 나쁘다’고 속으로 백번쯤 되뇌며,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에 다가섰다. 

그 때, 내 눈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승현의 모습이 잡혔다.

농구공을 한 손으로 튀기면서 어떤 여자애하고 사이좋게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승현하고만 친한데, 승현은 나 말고도 친한 친구가 많은 모양이었다. 

몰랐다. 


단정하게 자른 단발이 잘 어울리고, 

진하게 쌍꺼풀이 진 얼굴이 인형 같이 생긴 여자애였다. 

저렇게 예쁜 애가 같은 학교에 있었다니. 


“쳇, 예쁘네.” 


사이좋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 보는 건 좀 씁쓸한 일이었다. 

승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지 여자애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웃기도 했다. 


승현은 그런 여자아이를 보면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저 애 때문에 나하고 한 약속은 새까맣게 잊었구나.’ 싶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성질이 나서 창문을 홱 닫아버렸다.

쿵쾅거리며 걸어가 책상 위에 뒀던 책가방을 둘러멨다. 

교실을 나가려는데 문득 멀리서나마 승현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다시 창가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커텐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봤다. 

혹시나 승현이 나를 볼까봐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괜히 걱정했다. 승현은 이미 정문을 지나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여전히 크게 웃고 있었다. 

문득 저 여자애가 승현이 준비물을 빌렸다던 수현이라는 여자 애가 아닐까 싶었다. 

‘무슨 이야길 하길래 저렇게 재미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에 다시 몸을 돌렸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승현은 다시 우리 반에 오지 않았다. 

먼저 찾아가기도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물건을 빌려간 사람이 찾아와 돌려주는 게 당연했다. 

내가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 거니까 돌려달라고 먼저 말하는 것도 어색한 그림은 아니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2일을 보냈다. 


평소에는 복도에서 만나면 창피할 정도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던 승현인데, 

뭘 하는지 통 보이질 않았다. 

화장실에 갈 때나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면서 슬쩍 승현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날 봤다면 모른 척 할리가 없는데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복도를 왔다갔다하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운동장을 서성이고 했지만 승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그늘에 가서 누워있기도 했다. 


내일이면 주말인데 그 전에 승현을 꼭 만나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면서 승현의 반을 슬쩍 들여다봤다.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띄었다. 

승현이다.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엎드려 있는 승현의 뒷머리만 봤을 뿐인데, 

며칠 동안 마음 고생했던 건 싹 잊혀졌다. 반가웠다. 

당장 뛰어 들어가서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승현은 피곤한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기절을 한 건지 미동도 않고,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오늘따라 쓸쓸해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다시 월요일. 승현이 준비물을 빌려간 지 일주일이 흘렀다. 

미술시간에 붓글씨 실기평가를 치러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승현을 찾아가야만 했다. 


이제와 말이지만 

나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10년이 넘도록 다른 반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가 어쩔 수 없이 승현을 만나기 위해 옆반에 들어가야 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긴장이 돼서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었다. 

갈까 말까 백 번 천 번 고민하다, 

그래도 내 물건인데 달라고 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냐고 나를 설득했다.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승현의 반을 찾았다. 

창문으로 보니 승현은 교실 뒤편에 친구들하고 모여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고 승현이 있는 뒷문을 열었다. 


“어! 한채현! 웬일이야! 우리 반엘 다 오고!”


승현이 나를 알아봤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놀리듯 환호성을 질러대며 승현을 내 앞으로 떠밀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내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갰을 것이다.


“붓.”
“응?”
“붓, 지난 주에 빌려 갔던 거.”
“아, 맞다. 준다는 걸 깜빡했다.”


승현은 책상 옆에 걸려있던 가방을 뒤적여 붓을 찾아왔다. 

그리고 새 먹물통도 함께 건넸다. 

매번 빌려줘서 고맙다면서, 검은색 비닐봉투에 넣은 먹물을 함께 건넸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봉투를 낚아챘다.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뛰 듯 승현의 교실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문을 쾅 닫고, 그 앞에 서서 또 한 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치 전쟁을 치른 사람처럼, 

아직도 바들거리는 손으로 봉투를 꽉 움켜쥐고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심호흡을 하며 반으로 돌아와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두꺼운 천을 대고 위에 화선지를 놓고 

화선지가 날아가지 않게 서진으로 맨 위를 고정시켰다. 

벼루를 꺼내고 먹을 올려놓고, 내가 사 온 먹물 대신 승현이 준 먹물을 쓸 참이었다. 


먹물을 꺼내다 말고 한참 비닐봉지를 바라봤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뭔지 모르겠는데 바보처럼 좋은 기분이 들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려 정신을 차리고, 

먹물을 꺼내는데 봉투에서 하얀색 종이가 딸려 나왔다. 승현이 보낸 쪽지였다.


‘013-9204-2342. 내 전화번호야. 연락해!’


급하게 썼는지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누가 볼세라 승현이 보낸 쪽지를 

교복 재킷 주머니에 꾸깃거리는 채로 집어 넣었다. 

지난주 내내 가졌던 서운한 마음을 금세 잊고 나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나는 승현이 준 먹물이 아까워서 아주 조금만 벼루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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