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승현을 째려봤다.
“미안한데 난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라고.”
“아니, 양호 선생님이 너 데려다 주라고 그러셨잖아.....아니, 어차피 옆 반이라 가는 방향이 같......을걸? 아, 맞다. 나도 좀 쉬었다가 들어가야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보다 좋은 이유가 없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까지 지으며 날 내려다봤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도무지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꾸하기도 귀찮아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마를 탁탁 터는데 승현이 옆에 놔뒀던 상장을 집어서 건넸다.
“어차피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마음은 아니지만 일단 고맙다고 말했다.
승현과는 서로 불편해하며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나는 8반. 이승현이라고 해.”
“어, 나는 한채현.”
“잘 알지.”
“나를?”
“넌 좀 눈에 띄는 편이거든.”
“내가?”
“너 만날 상 받잖아.”
승현이 내 상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걸 보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작게 말했다.
다시 아무 말 없이, 조금 걷다보니 교실에 도착했다.
“먼저 들어갈게.”
“응. 또 보자.”
승현은 아마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승현과의 첫 만남이었다.
요란하게 만나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내 인생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다.
같은 반도 아닌 아이와 만나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내가 다니는 학교는 남녀공학이긴 했지만, 남녀별반이었다.
남자는 짝수반, 여자가 홀수반. 내가 9반이었고, 승현이는 8반이었다.
옆반이라고는 하지만 승현과는 만날 일이 없었다.
등교할 때 운이 좋아 실내화를 갈아 신다가 눈이 마주치는 정도였다.
아니면, 쉬는 시간에 급하게 화장실에 가다
복도에서 친구들과 레슬링을 하는 승현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목격하는 정도.
과학 실습실로 이동을 하거나 체육시간에 운동장으로 나가면서
8반 교실을 들여다보면 승현은 교실 뒤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 정도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승현과 만날 빌미를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처음엔 승현이었다.
세 번쯤 우연히 오며가며 인사를 하게 되자
승현은 점점 날 반갑게 대했다.
옆반이었던 탓에 승현은 준비물이 없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를 찾았다.
“야아~ 한채현!”
반 친구들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는 나였기 때문에,
승현의 방문은 꽤나 관심을 받았다.
승현은, 이방인의 방문에 낯설게 반응하는 여학생들의 눈빛을 무시하고, 담담하게 교실 문턱을 자주 넘었다.
창문을 벌컥 열고 내 이름을 불렀고,
지나가는 길에 괜히 내 머리를 쿡 누르기도 했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싫지 않았다.
가끔은 반갑기도 했다.
승현과의 대화는 정말이지 사소했다.
“나 어제 12시간이나 잤다.”든가,
“오늘부터 매점에서 만두를 판다더라.” 같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내용들이었다.
여름 향기가 완전히 걷힌 어느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눈부시던 어느 날.
손목을 덮는 교복 블라우스 자락이 까실까실하게 살갗을 간질이던 그 날.
4분단 복도 쪽에 앉은 나는 쉬는 시간만 되면
자꾸 소매깃이 닿아 간지러운 손목을 긁으면서 창가를 찾았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구나.’
마치 폭풍전야처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파랬다.
중력이라는 것이 없어져, 바다가 하늘에 가 달라붙은 것처럼 새파랬다.
바람도 새삼스럽게 신선했다.
봄에 부는 바람과는 확실히 다르게 쓸쓸하고 건조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늘, 딱 기분 좋을 만큼만 날 외롭게 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한채현! 한채현! 채현, 채현, 채현!”
승현이 또 창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자리로 돌아가려다 승현의 등장에 깜짝 놀라 넘어질 뻔 했다.
허공에서 두 손을 버둥거리다 결국 넘어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넘어져버릴 것을.
안 넘어지려고 버둥거리다 흉한 꼴을 보였다.
두 다리를 높이 쳐들었다가 풀썩 고꾸라졌다.
그것도 승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느린 동작으로 자빠졌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아픈 척을 해야 하는 건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승현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너 지금 엄청 창피하겠다? 으하하하하. 야, 조퇴하겠다고 담임한테 말해. 어디 부끄러워서 수업 듣겠어? 야! 좋은 구경했다.”
얼마나 웃었는지 승현은 어지럼증을 느낀 듯 했다.
고개를 빠르게 가로 저으면서 어지럼증을 떨궈 내고 있었다.
이렇게 얄미운 인간이었다니.
아직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승현을 노려봤다.
왜 왔냐고 묻기도 싫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제야 승현이 교실로 들어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승현은 생각보다 힘이 셌고 손도 컸다.
내 두 팔을 잡고 번쩍 들었다. 포크레인이 흙을 떠올리는 것처럼, 몸이 쑥 들렸다.
“붓하고 먹물 좀 빌려줘라. 딱 그것만 못 빌린 거 있지.”
승현은 넘어질 때 내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면서 용건을 말했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붓하고 먹물만? 다른 건 다 있어?”
“어, 그건 5반에 수현이라고 아나?”
“아니, 내가 어떻게 알아. 몰라.”
모르는 여자 애의 이름에 의도했던 것보다 과하다 싶게 쏘아붙이고 몸을 돌렸다. 너무 했나 싶었지만 미안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몰라? 알 줄 알았는데 아무튼 다른 건 걔한테 빌렸어.”
안 궁금했다.
“먹물이 있긴 한데 한 번 쓸 정도 밖에 안 남았을 거야. 그냥 다 쓰고 버려줘.”
“알겠어. 고마워. 미술시간 마치고 바로 돌려줄게.”
“응.”
시큰둥하게 책상 옆에 걸어뒀던 보따리를 건넸다.
승현은 내가 넘어지던 모습이 그렇게 웃겼는지 끝까지 실실 웃으면서 교실을 나갔다.
서운한 마음에 승현이 나간 방향을 쏘아봤다.
내가 넘어졌는데, 화들짝 놀라 달려올 정도는 아니더라도 놀라는 시늉은 해줄 줄 알았다.
그렇게 신이 나서 깔깔거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서운한 마음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