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가장한 운명
평소 같으면 무서웠을 이 낯선 목소리가 귀찮게 느껴졌다.
지금은 이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굳이 눈을 떠서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됐든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난 매우 완벽한 기분었다.
정체불명의 그가 얼른 사라져 주길 바라고 있는데,
되려 그 목소리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내 말 안 들려? 저기 눈 좀 떠 봐!”
그 남자가 손으로 내 볼을 가볍게 몇 번 쳤다.
몸을 들척이던 남자의 손길이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천만 다행이었다.
실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조용했다.
저 멀리서 바람 때문에 모래가 가볍게 떴다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삑. 삑.”
또 다시, 평화를 깨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렸다.
모르긴 해도 최소 4명 정도가 달음박질을 쳐 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였다.
너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보니
호루라기를 부는 양호 선생님을 필두로,
웬 남학생들이 여럿 전력질주를 해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누가 다쳤나? 그런데 왜 이 쪽이야? 설마 나한테 오는 건가? 아, 뭐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생각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분주한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이미 양호 선생님이 내 앞에 멈춰 섰다.
“채현아! 괜찮니? 괜찮아?”
어리둥절하게 일어나 앉은 내게 양호 선생님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햇살 때문에 찡그린 눈을 겨우 뜨고 대답했다.
그 뒤로 민망해하며 서 있는 초면의 남학생들 서너 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닌데, 너 아까 분명히 내가 불러도 모르고 쓰러져 있었잖아.”
“나?”
아까 나한테 말을 걸었던 목소리다.
뭐라고 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맞다고 양호 선생님은 나를 끌고 굳이 병원 응급실로 향할 게 분명했다.
병원에 가면 엄마, 아빠한테 전화가 가겠지만 연결이 안 돼
할머니 또는 친척들한테 2순위로 내용이 전달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기까지 하면서,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아무래도 네가 헛것을 본 것 같다고 잡아뗐다.
양호선생님이 원망이 섞인 눈빛으로 그 남자애를 째려봤다.
당황한 듯 두 손을 허공에 내졌던 남자애가
이내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별 일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어찌됐든 채현이 너 지금 수업시간인데 밖에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승현아, 네가 채현이 데려다 주렴. 옆 반이지?”
그렇게 한낮의 소동은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한창 좋던 참인데 저 승현이라는 애 때문에 다 망쳤다.
양호 선생님과 뒤를 따랐던 남자애들 2~3명이 몸을 돌려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다시 누웠다.
승현이는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