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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Dec 25. 2016

순정만화(2)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오, 채현이 왔구나. 이번에도 전교 1등이라니 대단하구나.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시겠다. 근사한 선물이라도 사달라고 하지 그러니? 하하하하.”


자신의 입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허리를 젖히고 웃어댔다. 

나는 대체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어정쩡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시늉을 해보였다. 

웃음이 잦아들자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 부모님은 뭐라시니?”
“딱히....”
“딱히?” 
“네, 잘 모르세요.”


교감 선생님이 웃음기를 거두고 ‘그것 참 이상하네’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뭔가를 물으려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다행히 방송이 시작돼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15분 쯤 지나 방송부 학생이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위 학생은 2013학년도 2학기 중간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타의 모범이 된 바 이 상을 수여합니다.”


상장을 받고 교감 선생님을 향해 인사를 한 번, 

뒤돌아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한 번. 익숙하게 움직였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대기 시간까지 합쳐 불과 20분 정도였을 뿐이었는데 

압박붕대가 몸에 둘러진 것처럼 답답했다.


해방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교감 선생님은 

적어도 50년 전부터 반복됐을 것 같은 ‘훈화 말씀’을 시작했을 것이다.


교실에서 재빠르게 내려왔던 것과 달리 올라가는 속도는 더뎠다. 


조회가 끝난다고 해도 1교시는 H.R이었다.

결석을 해도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곰팡이 냄새가 올라오는 나무 난간을 잡고 

반층을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그러다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입학할 때부터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큰 아카시아 나무가 한 그루 심겨 있었다. 

어찌나 큰지 두 팔을 벌려도 손 끝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이 아카시아 나무가 만든 그늘에 숨어서 하늘을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곤 했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아카시아 나무 그늘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체육복을 입고 왔다면 대(大) 자로 뻗어 있었겠지만 

아쉬운 대로 나무에 등을 대고 기대앉았다.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을 만지작거리면서 한 손에 든 상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걸 들고 집까지 갈 생각을 하니 귀찮아졌다. 


집에 가봐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줄 사람도, 

같이 좋아해 줄 사람도, 아니, 왔구나 인사해 줄 사람도 없다. 


상장은 집에 쌓여 있는 많은 폐지 중 하나였다. 

다만, 내 이름이 궁서체로 쓰여 있어 

폐지로 버리자니 찝찝한 그런 물건이었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쓰레기나 다름 없는 종이 쪼가리를 가져간다고 반겨줄 사람이, 

적어도 우리 집에는 없었다. 


큰 돌멩이를 주워 상장 위에 괴어 놓고 잠깐 눈을 감았다. 

살랑, 바람이 불었다. 


이쯤이면 늘 날씨가 좋았다. 

하복을 벗고 긴 소매 블라우스로 된 춘추복을 입을 때쯤이면 

날씨가 좋아 가슴이 방방 뛰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모래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더러워지면 빨면 됐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다 아플 참이었다. 


아카시아 꽃잎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머리를 누이고, 두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렇게 서너 번 하니 명치까지 차올랐던 답답함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저기... 지금 여기 있으면 안되는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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