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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Oct 23. 2016

순정만화(1)

인생의 결정적인 하루가 바로 오늘일지도 몰라

2학년 9반 한채현 학생. 교무실로 내려오세요. 다시 한번 말합니다. 
2학년 9반 한채현 학생, 한채현 학생, 지금 바로 교무실로 내려오세요.


아마도 지난주에 치렀던 중간고사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담임 선생님이 꼬리표를 나눠 주면서 이번에도 내가 전교 1등이라고 살짝 귓속말을 해줬었다. 조회 시간에 우등상을 주려고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반 친구들 사이를 지나 교실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 하나 차이일 뿐인데 복도에서는 교실 안과는 완전히 다른 냄새가 났다. 


가벼운 먼지 냄새 같기도 했고 퀘퀘한 지하실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복도는 늘 서늘했다. 

이대로 해가 지면 반대편에서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귀신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오래돼 곰팡이가 슬었을 나무 난간을 잡고 탁, 타닥, 탁 불규칙하게 발을 구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우등상은 지난 학기에도 받았다. 

언젠가부터 우등상은 내가 받는 게 당연한 그림이 됐다. 


샘을 내는 친구도 없었고 선생님들도 딱히 기특해하지 않았다. 

대단한 칭찬도 없고, 부러움도 없었다. 그냥, 내 옆자리에 앉은 애가 반에서 5등, 10등, 20등, 30등을 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나는 1등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날씨가 좋아서였던 것 같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즈음에 늘 2학기 중간고사를 치렀다. 


달큼한 향이 나는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선덕 거리는 마음으로 교무실 앞까지 왔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익숙하게 교무부장 선생님 자리를 찾아갔다. 

누워있는 건지 앉아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의자에 몸을 걸친 선생님을 발견했다.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왼손만 쓱 들어 방송실을 가리켰다. 


가 봐.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방송실 문을 열자 뒷머리를 길게 길러 빈 소갈머리를 감춘 교감선생님이 보였다.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이며 빗질을 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머리숱이 없는 건 마찬가진데, 교감 선생님의 손은 눈물이 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을 스프레이로 고정을 한 후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한참 매무새를 살피다 거울에 비친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광대처럼 입을 세모 모양을 만들어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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