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다면 말이야
예를 들면 그런 거
강의실 복도에서
수업에 늦어 급하게 뛰어가다 부딪히듯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 같은 것.
"미안합니다."
얼굴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고개부터 푹 숙이고
미안한 마음은 한가득인데
내가 지금은 너무 바빠서
이제 그만 실례를 해야겠다고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헛웃음에 섞여 나오는 내 이름을 들을 때
아, 이런 게 우연이겠다 싶었다.
길을 가다가 나는 버스 안에서, 너는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우연
오늘도 빨간불 신호등에 걸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매일 가는 도서관이 너무 지겹고
단풍놀이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한 내 청춘이 억울해
이십대를 돌려내라고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 하고 싶은 마음인 날이었다.
그래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이 신기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마냥 고마워
입을 헤 벌리고 구경을 하는데
저 멀리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너를 발견했을 때
이렇게 만날 수도 있는 거구나
새삼 놀랐었다.
마지막으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가려다
좀 잦아들면 뛰어가야겠다 생각하고
근처 계단 아무데나 자리잡고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떤 느낌일까
짧은 손을 쭉 뻗어 청승을 좀 떨어볼까 하는데
그때 갑자기
옆에서 쑥 두꺼운 손바닥이 나오고.
나는 도망가야 하나 뒤돌아 봐야하나
삽시간에 머릿 속은 오만 잡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나는 뒤로 맨 책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데서도 만나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너를 보고
나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이
우산 좀 빌려쓰자며
넉살 좋게 너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우연 쯤은
이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필연의 탈을 쓴 우연
이 두 가지를 나는 구분하지 못해서
뒤늦은 후회를 한다.
버스 창문을 두드리던 너를 보고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욕을 제대로 들어 먹더라도
벨을 눌러볼 걸.
그렇게 뛰어내려가서 이렇게 만날 줄 생각도 못했는데
이렇게 된 거 우리 놀러가지 않겠냐고.
말이라도 건네볼걸.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날에는
나도 기분이 많이 떨어져서 바닥을 뚫을 기세니
이런 날 나를 좀 위로해 주면 안 되겠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해볼걸.
이미 일년이나 지나
이제는 한숨으로 섞여 나오는 기억이 되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다시 한 번 만난다면
그 때는
예전에 네가 그랬듯이
내가 해보이겠다고
커피 한 잔 하고 가지 않겠냐고
오랜만인데 여전하다고
이번엔 내 쪽에서 해보이겠다고
의미도 없는 다짐을 여러 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