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명 Aug 23. 2016

혹시라도 우리

다시 만난다면 말이야

예를 들면 그런 거

강의실 복도에서 

수업에 늦어 급하게 뛰어가다 부딪히듯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 같은 것.


"미안합니다."

얼굴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고개부터 푹 숙이고


미안한 마음은 한가득인데

내가 지금은 너무 바빠서

이제 그만 실례를 해야겠다고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헛웃음에 섞여 나오는 내 이름을 들을 때


아, 이런 게 우연이겠다 싶었다.


길을 가다가 나는 버스 안에서, 너는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우연

오늘도 빨간불 신호등에 걸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매일 가는 도서관이 너무 지겹고

단풍놀이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한 내 청춘이 억울해

이십대를 돌려내라고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 하고 싶은 마음인 날이었다.


그래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이 신기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마냥 고마워

입을 헤 벌리고 구경을 하는데


저 멀리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너를 발견했을 때


이렇게 만날 수도 있는 거구나

새삼 놀랐었다.


마지막으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가려다

좀 잦아들면 뛰어가야겠다 생각하고


근처 계단 아무데나 자리잡고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떤 느낌일까

짧은 손을 쭉 뻗어 청승을 좀 떨어볼까 하는데


그때 갑자기

옆에서 쑥 두꺼운 손바닥이 나오고.

나는 도망가야 하나 뒤돌아 봐야하나

삽시간에 머릿 속은 오만 잡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나는 뒤로 맨 책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데서도 만나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너를 보고


나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이

우산 좀 빌려쓰자며

넉살 좋게 너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우연 쯤은

이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필연의 탈을 쓴 우연

이 두 가지를 나는 구분하지 못해서

뒤늦은 후회를 한다.


버스 창문을 두드리던 너를 보고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욕을 제대로 들어 먹더라도

벨을 눌러볼 걸.


그렇게 뛰어내려가서 이렇게 만날 줄 생각도 못했는데

이렇게 된 거 우리 놀러가지 않겠냐고.

말이라도 건네볼걸.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날에는

나도 기분이 많이 떨어져서 바닥을 뚫을 기세니

이런 날 나를 좀 위로해 주면 안 되겠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해볼걸.


이미 일년이나 지나

이제는 한숨으로 섞여 나오는 기억이 되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다시 한 번 만난다면


그 때는

예전에 네가 그랬듯이

내가 해보이겠다고


커피 한 잔 하고 가지 않겠냐고

오랜만인데 여전하다고


이번엔 내 쪽에서 해보이겠다고

의미도 없는 다짐을 여러 번 했다.

작가의 이전글 <인생 역전은 없다-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