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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Aug 21. 2016

<인생 역전은 없다-10>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지난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단순하게 아는 사이는 아닌 사이가 됐다.

늘 서로를 궁금해 했다.

일어났는지, 뭐하는지, 점심에는 뭘 먹었는지,

오늘은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말 고사는 잘 봤는지, 성적은 어떤지 같은 사소한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문자를 보낼 때도 있었고,

그가 먼저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고시원 옆방의 인연이 이렇게 깊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만 보면 그가 고시원에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독립심이라고 밖에는

집을 나와 사는 이유를 추측하기 힘들었다.


확실한 건

나하고 어울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는 날 위해줬다.

나는 순수하게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었다.

오늘처럼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내게는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


이런 날 40만 원 정도는 그를 위해서 쓸 용의가 있었다.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문자를 보내 오늘은 저녁시간을 비워두라고,

내가 고기를 사겠다고 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 그가 고시원 아래서 나를 불렀다.


“난 벌써 와 있지.”


그 달콤한 목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춥고 배도 고프고 얼른 내려와 달라는 성화에

큰 맘을 먹고 전화를 끊었다.


나가기 전에 화장을 고치고, 옷도 다시 한 번 매무새를 고쳤다.


고시원 입구에 서 있던 이 남자는 멋있었다.

내 눈에는 정말 완벽한 사람. 그가 정말 좋았다.


얼굴을 보자 반가워서 팔짱을 끼고 옆에 나란히 섰다.

늘 가던 치킨집을 지나 그 옆에 있는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마음대로 시키라는 말이 의심스러웠는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겨울 공기에 차가워진 손을 그의 얼굴에 갖다 대며 꿈 아니라고 놀려줬다.


우리는 많이 먹었다. 술도 많이 마셨다.

많이 웃었고 많이 행복했다.

내가 이렇게 조금씩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내게도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 오늘,

나는 그에게 정식으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할 참이다.

내 마음 속에서 완벽한 타이밍을 찾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오늘인 것 같았다.


그는 여러 번 내게 말했었다.

사귀어보지 않겠냐고.

그러면 나는 내 지독한 삶의 무게를 이유로 아니라고 했다.


내가 누군가와 연인이 된다면 그건 너이길 바라지만,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아줄 정도로 여유가 없다.

상처만 될 것이다.

이게 그동안의 내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왜인지 모르겠다.

그는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내 곁을 지켜줬다.

내가 뭐라고...

그게 고마워서 나는 이 남자에게 내 맘과 몸을 고스란히 바칠 작정을 했다.


그리고 지금,

들고 있는 이 소주잔을 한 번에 들이킨 후

처음으로 내가 먼저 고백이라는 걸 하기로 결심했다.


마시자!

그의 잔을 채우고 함께 건배를 했다.

그리고

오싹할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너희 아빠, 쓰러지셨다. 성모병원 응급실. 각목이 쓰러지면서 아빠를 덮쳤다나봐. 지금 검사받고 기다리는 중인데...”


불길했다.


“혹시 너 천만원 쯤 구할 수 있을까.”


그래. 이거였다.


내 앞 반짝 경고등이 켜졌다.

너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신의 메시지였다.


나는 나였다.

떨쳐내지 못할 가난의 띠를 문신처럼 새기고 태어난 운명을 견뎌야 하는 사람.


그래서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이어야 했다.

비극은 모두가 안타까워 하지만

누구도 동참하려 하지 않는 슬픈 이야기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모두가 안타까워하지만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레이스다.


그걸 아는 내가

이 남자를 내 비극에 끼어들게 할 수 없다.


우습다.

감히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하려고 했다.

내가 감히...


들고 있던 소주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가자.”


옆방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아직 입 안에 가득 든 고기를 우물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원래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고시원에 도착했다.

통장을 챙겨들고, 신분증을 챙겨 들고, 지갑을 챙겨 들고

그대로 달려 나왔다.


성모병원까지 한 시간.

아직 버스는 다니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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