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하교 후에 집 근처에 있는 구립 도서관에 갔다.
집에 가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던 내게
도서관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이 만한 곳이 없었다.
우리 집은 늘 불행했다.
늘 큰소리가 났고, 가족애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모는 먹고 살 걱정 때문에 자식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서로 싸우느라 시간을 축 냈다.
엄마는 식당에서, 아빠는 직장을 꽤 여러 번 옮기며 일을 했다.
매일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수업료를 겨우 냈고, 수련회비를 겨우 냈고, 체육복을 겨우 사줬다.
늘 ‘겨우’, ‘가까스로’ 해결이 되는 집이었다. 대화도 없었다.
사람 말소리가 날 때는 엄마하고 아빠가 싸울 때뿐이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이면 더 참기 힘들었다.
아빠는 술 기운을 빌려 엄마를 때렸다. 여러 번 세게 때렸다.
엄마는 아빠한테 떠밀려 바닥에 패대기가 쳐졌고 그럴 때마다 통곡을 하며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아빠는 욕을 퍼붓다 대문을 쾅 닫고 집을 나갔다.
지루한 패턴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이 싫었다.
마치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 나오는 주인공 그루누이처럼,
저주 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다른 애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늘 불행했다.
상대적으로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아빠를 선택한 건 엄마니까 100% 피해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20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살면서 가출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출이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투쟁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버텨야 했다.
아직 나는 미성년자였다.
직업을 구할 수도, 웬만한 돈벌이를 할 수도 없었다.
잘 해야 주유소 아르바이트, 패스트푸드 점 시간제 근무인데
그마저도 학생이기 때문에 시급이 지나치게 낮았다. 한 달 생활이 유지될지 미지수였다.
심지어 퇴근 후에는 집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나를 구제해주지는 못했다.
직업도 없는 상태에서 가출까지 한다는 건 나를 사지로 내모는 꼴이었다.
대책 없이 가출을 했던 친구들이 못 이기는 척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정말 모양 빠지는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늘 5년 후를 생각했다.
올해 18살, 고등학교 2학년, 5년 후에는 23살이었다.
운 좋게 대학교에 진학한다면 졸업을 하고 번듯한 일자리를 가질 ‘기회’가 생기는 나이였다.
그 때, 보란 듯이 독립을 해서 가족들과 인연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10년도 더 된 내 오랜 꿈이다.
그리고 저주 받은 목숨으로 나를 키운 부모에 대한 복수였다.
어찌됐든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있었다.
폐관시간이라는 안내 방송을 들은 후에야 짐을 챙겼다.
이상하게 집에 가기 싫은 날이었다.
어제 술에 취해 들어왔던 아빠가 엄마를 때리던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남동생이 친구들에게 더럽다며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서 일수도 있다.
집에 가는 게 눈물 날 만큼 싫었다.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서서 발끝으로 땅을 콩콩 굴렀다.
파란불이 켜졌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는데 맞은편에 설치된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손을 넣고 있던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오후에 승현이 줬던 쪽지가 만져졌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걸 알지만 괜찮지 않을까,
승현이라면 봐주지 않을까 어리광 섞인 기대를 했다.
지금 이 순간 승현이 몹시 필요했다.
“여보세요?”
“나야.”
“누구? 이수현이냐?”
지금 상황에서 반갑지 않은 이름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아니, 한채현.”
“뭐? 누구라고?”
“채현이. 한채현. 옆 반에, 오늘 붓 찾으러 갔었......”
“엇! 쪽지 봤구나! 어디야?”
“나 도서관 앞인데...”
“어??! 나도 그 근처인데....조금만 기다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