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웠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다리겠냐고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이 시간까지 뭐 했냐고, 웬일로 전화를 했냐고,
집에 안 가고 무슨 일 있냐고, 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다리라고 한 승현이 고마웠다.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나주겠다고 한 승현은 은인이었다.
5분 쯤 지나자 승현이 내가 있는 횡단보도 맞은 편에 섰다.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며 내가 있는 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알겠다며 함께 손을 흔들어보였다.
“미안.”
“오히려 내가 고마운데? 나도 집에 가던 길이었어.”
“나도. 그런데 가기 싫었어.”
“반항하는 거야? 사춘기라고 하기엔 좀 늦은 거 같은데!”
승현이 장난을 치다 멈추어 섰다.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바보 같을 정도로 환하게 웃던 승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봤지만,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은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전히 눈물이 났고, 그 눈물을 멈추게 할 힘이 없었다.
아무것도, 늘 그렇듯이 나는 가진 게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제어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울어버려.”
승현이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더 울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승현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냥 내 옆에 있었다.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가만히 내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그 후로 나는 자주 승현을 불러냈다.
집에 가기 싫을 때면 승현한테 컵라면을 얻어 먹었다.
승현은 당연한 듯 돈을 냈고 나는 다른 누구에게 한 번도 그러지 않았으면서
승현에게는 넉살 좋게 이것저것 사달라고 졸라댔다.
이번 달에는 용돈을 다 썼다고 울상이 돼도,
나는 이렇게 된 거 오늘 다 써버리자면서 커피 우유를 하나 더 집어 오기까지 했다.
승현은 내게 많은 걸 묻지 않았고, 딱 적당하게 선을 지켰다.
승현과의 대화는 늘 즐거웠고 웃음이 났다.
“넌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
“그럼 너지! 나겠니? 난 이래봬도 인기가 제법 많다고. 넌 모르겠지만.”
“나야, 뭐..좀 쓸쓸하겠지만 그럭저럭 살겠지. 지금까지도 잘 살았으니까. 아, 잘 살았다는 아니고 그냥 살았다 정도?”
“근데 ‘좀’ 쓸쓸하겠다고? 내가 ‘좀’ 밖에 안돼? 아, 서운하려고 그래!”
속마음하고는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좀’이라니 말도 안됐다. 지금 승현은 내게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승현의 표정에 내 기분이 하늘로 치솟았다 땅으로 내리닫길 하루에 여러 번이었다.
승현이 무심결에 말하는 수현이라는 아이의 안부라도 들리는 날에는
습관처럼 하던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쩌다 주말에 가끔 승현과 함께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을 때면,
승현의 숨소리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빵 터질 것 같았다.
둘이 있을 때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승현이 내게 그랬듯 나도 거리를 지켜야했다.
그래, 내가 뭐라고.... 승현에게 그런 걸 물을 자격은 없었다. 지금 이 관계만으로도 승현은 내게 과분했다.
승현은 키가 컸다. 키가 작고 깡마른 나하고 비교할 때 정반대였다.
늘 농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를 만나러 올 때면 반바지에 큰 박스티를 입고 한 손에는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땀에 젖어 올 때도 있었고, 보송보송하게 생머리를 나풀거리면서 달려올 때도 있었다.
승현은 손이 컸다. 농구공을 한 손에 잡을 만큼 손이 컸다.
한 번은 정신을 놓고 그 손을 한동안 지켜보다 승현에게 걸린 적도 있다.
그리고 승현은 등이 참 넓었다.
언제 한 번 저 등에 안겨 펑펑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따뜻한 감정이 들게 했다.
승현은 다정했다. 목소리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뒷음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내 말에 반응했다.
차가 지나는 길을 걸을 때면 나를 안쪽으로 들여 보냈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내 팔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등에 매고 있는 가방이 무거워 보이면 바닥에 손을 넣어 살짝 들어주기도 했다. 승현은 그랬다.
그래서 나는 늘 자신이 없었다. 나는 볼품이 없었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가슴도 작았다. 얼굴은 어두웠고 표정은 팍팍했다.
자랑이 될 만한 걸 찾아봤지만 나는 승현 앞에서 작아졌다.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 라고 위로하기엔 속 모습은 더 엉망이었다.
이런 나한테 승현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고마웠다.
여러 번 승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하고 친구가 돼 줘서 고맙다고, 18년을 혼자 살아왔는데 ‘대화’를 할 수 있는
너라는 친구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행복해졌다고 인사를 했다.
기말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승현이 나를 보러 도서관에 왔다.
승현은 어제 꿈자리가 사나웠다며 굳이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도서관 앞까지 찾아왔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다.
한사코 괜찮다고 말렸지만 승현은 고집스럽게 도서관 문 앞에 서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집에 가지. 괜찮다니까.”
“안 돼. 넌 공부만 하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몰라. 어제 진짜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뭔데?”
“몰라. 말도 하기 싫어. 가자 얼른.”
“아빠한테 무참하게 매를 맞는 딸의 모습 그런거 아냐? 아니면 피가 날 정도로 싸우는 부모 때문에 충격 받은 딸의 모습 그런거.”
“그런 말 하지도 마.”
“농담인데 뭐.”
승현의 표정이 굳어지는 바람에 되려 당황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