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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Dec 30. 2016

순정만화(8)

웃지 않는 승현의 얼굴이 너무 어색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정말. 농담한 거 가지고 왜 그래.”


달래듯 말을 걸었지만 승현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쥐어주고는 파라솔처럼 큰 우산을 펼쳤다.


나는 뛰어들듯 우산 안으로 들어가 승현 옆에 착 달라붙어 섰다.

물색없이 웃으면 승현의 마음이 풀어질까 해서 헤헤 웃기도 했다.

승현은 굳은 얼굴로 비 맞지 않게 조심하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늑했다.


그제서야 기분이 풀렸는지 승현은 하루종일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도서관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나는 깔깔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학교 밖에서는 처음으로 만났던 그 횡단보도에 다시 승현과 나란히 섰다.

파란불을 기다리다가 본 승현의 옆모습에 갑작스럽게 가슴이 떨렸다.

처음 도서관 앞에서 승현을 봤을 그 때처럼.


이런 감정이 승현에게 미안했다.

동시에 정말 불안하지만 승현의 마음이 궁금했다.

나한테 잘해주는 마음이 어떤 의미인지,

이게 아이들이 말하는 우정이라는 건지, 아니면 (감히) 사랑이라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확인받고 싶었다.


“혹시 말이야...”


승현은 내 질문에 당황한 듯했다. 내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요즘 좀 예민했던 것 같다.

‘여자로 좋다거나’라는 말을 하다니, 내가 말하고도 인상이 팍 써졌다.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승현과 내 사이가 얼마나 멀어질 것인지 대충 가늠이 됐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5분 전으로 되돌려 놔야 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했다.

태어나서 제일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영어, 과학, 수학, 체육, 가정 같은 과목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 아니, 난 그냥 네가 오늘 너무 오바를 해서 장난해 본 거야. 미안, 미안. 괜히 어색해졌네. 아하하.”
“장난이라고?”
“응. 당연하지. 아, 맞다. 나 얼마 전에 수현이 봤는데.... 다른 사람하고 있던데...?”
“갑자기 웬 수현이 얘기야?”
“그냥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니까 나도 친하게 생각하고 있거든.”


승현이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 휴대폰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수현이었다.


“그래, 수현이. 두 사람은..... 얼마나 친..해?”
“진짜 넌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좀 서운하려고 그런다. 얘가 수현이야.”
“응, 알고 있었어. 5반에 수현. 너 준비물 빌려주는 친구.”
“이러니까 내가 바보라고 하지. 얘 이름이 이수현. 내 이름이 이승현. 뭐 느껴지는 거 없어? 답답하다. 내 쌍둥이잖아. 멍청아. 넌 대체 이 머리로 어떻게 전교 1등을 하는 거냐? 이상하면 물어보기라도 하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 그럼 막 되게 특별하고 그렇고 그런 건 아니네?”
“뭐야 관심 없는 척 했으면서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진짜 바보 같네.”
“아, 쌍둥이가 이렇게 안 닮을 수도 있구나.”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거 맞지. 아니 나는 네가 몰랐다는 게 더 이상한데? 너는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만난 거야?”
“응? 응....원래 친구들이면 다 이런 건 줄 알았지.... 나는.... 친구가 없고...그리고 또...”
“아무리 친구라도 이렇게는 안 해. 바보.”


마음이 울렁거렸다. 꿈이다. 꿈만 같다.

말을 꺼낸 건 나였는데 마침표는 승현이 찍어줬다.


승현이 어깨를 두르고 있던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하지 말라며 저만큼 달려 나갔을 텐데

오늘은 가만히 승현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승현의 반에 처음 찾아갔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야, 괜찮아? 너 왜 가만히 있냐? 너답지 않게 말이야.”


승현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얼굴을 바짝 갖다댔다.

가까이에서 보는 승현의 얼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기뻤다. 행복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니, 나 지금 안 괜찮은 거 같아. 이리 와 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캔 커피를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승현의 얼굴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승현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 상태로 멈춰서서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섞여 입 안으로 들어왔다.

태어나 처음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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