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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걸음 Dec 28. 2021

《김소연 산문집 – 나를 뺀 세상의 전부》


P.53

그림책을 건네는 그 순간이 참 좋다. 처음 만났다는 서먹서먹함이 누그러진다. 그림책 선물을 즐기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다. 두껍거나 명철한 책들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분이다. 우선 받는 이가 부담을 느끼질 않는다. 받아들고서 씨익 웃고, 그 자리에서 펼쳐본다. 


P.54

내가 건넨 책으로 독서를 하는 표정을 그 자리에서 지켜볼 수가 있다.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되어서 만남을 시작한다.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된다는 걸 가장 짧은 시간에 경험할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지만 뼛속까지 아날로그 인간인 나는 유튜브보다 라디오를 즐겨듣고 티브이 보다 팟캐스트를 좋아한다. 요즘 새롭게 즐겨듣는 라디오 방송이 생겼는데 ‘윤고은의 EBS 북 카페’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놓치지 않고 찾아듣는 시간이 김소연, 서효인 시인이 함께하는 ‘시인의 논리’ 코너다. 나에게 시는 친해지고 싶지만 가까워지기 어려운 친구 같아서 시집은 좋아서 사놓고 잘 꺼내어 보지는 않는 이상한 습관이 있는데 금요일마다 시인의 낭독을 즐겨들으며 시도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최근에 김민정 시인의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를 꺼내어 읽고 시가 이렇게 매력 있는 문학작품이구나! 다시 생각하게 됐고 신용목 시인의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를 읽으면서도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탄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사두었던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읽었다. 


이 책도 역시 낭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듣지 않을 수 없는 명작 오디오 클립 《요조의 세상에 이런 책이》에게 듣고 구매해두었던 책인데 이제야 읽어봤다. 역시 책은 사놓은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진리를, 책은 반드시 내게 필요한 순간에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는 운명을 믿게 해준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김소연 시인의 일상과 여행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지만 계절의 이야기로 구분되어 있다. 겨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겨울에서 끝나는 책의 구성인데 ‘2018년 12월 장롱 속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꺼낸 날에 쓴’ 시인의 서문을 읽자마자 ‘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 책을 읽는구나!’ 감격하며 이불 속에서 귤 까먹으며 읽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공감하면 읽었던 챕터는 ‘그림책 선물’이라는 챕터였는데 나 역시 그림책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렇다. 그림책을 좋아한 이후로는 그 어떤 선물보다 그림책을 친구들에게 많이 선물했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선물로 주고받는 일을 좋아할 테지만 선물 받는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림책은 끝까지 읽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글과 그림이 담긴 하나의 예술작품을 선물한다는 느낌이 좋다. 금방 읽어버리는 그림책 한 권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렇게 손쉽게 소장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그림책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쉬이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시인의 말대로 그림책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된다는 걸 가장 짧은 시간에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책은 너무 좋아서 친구에게 이 책 꼭 읽어봐 이 부분이 너무 좋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책을 다 읽어내기까지 그 시간의 감정은 날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떤 그림책은 너무 좋으면 그냥 책을 펼쳐서 친구에게 보여주거나 같이 읽으면 된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우리는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림책이 너무 좋아서 그림책 서점에서 일도 했었고 그림책 모임을 만들기도 했었고 또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는 수업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멈춘 상태이다. 그저 가끔 생각나는 그림책들을 꺼내어보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만의 감상으로 남겨둔다.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 될 줄을 몰랐지만 그래도 오늘도 오늘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지금의 어려움이 유유히 흘러가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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