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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Apr 26. 2024

코끼리와 태극권

내가 코끼리를 닮았다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서너 달이 지났을 때다. 남편이 라면을 끓였다. 모유 수유 중이라 MSG를 제한하고 있던 나는 '한 젓가락만~"라고 마주 앉았다. 남편은 정말 한 젓가락도 양보하기 싫었는지 "야~ 너 거울 좀 봐! 뒷모습이 코끼리 같아." '헉, 라면 한 젓가락 때문에 이렇게까지!' 그렇게 4가지가 없게 말해 준 남편 덕분에 그날부터 오기로 며칠을 굶었다. 


첫째 때 잘 빠지던 몸무게가 둘째를 낳고 좀처럼 변화가 없다가 화가 나서 굶었더니 3일째부터 쑥쑥 빠졌다. 또, 아이들을 재워놓고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라치면 남편은 "야~ 애들 먹으라고 샀더니 애를 재워놓고 혼자 다 먹으면 어떡하냐."라고 이후로도 여러 번 내 속을 긁는 말을 했다. 지금은 MBTI라는 게 있어 서로의 기질을 이해하면 덜 상처받았겠지만, 그때는 남편이 무심히 내뱉은 말로 인해 수시로 다투고 묵언 수행을 반복했다.



© ilumire, 출처 Unsplash




우리 부부는 같은 과 커플이다. 졸업 후 몇 년을 절절하게 장거리 연애까지 하다가 결혼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쟁이 시작되었다. 각자 지인들에게 훈수까지 받아가며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살벌한 신혼생활을 겪었다. 남편이 아무리 던져도 깨지지 않는 코렐 물컵을 던지자, 나는 물이 가득 든 살짝 밀치기만 해도 깨질 것 같은 2리터 훼밀리 유리병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 wacalke, 출처 Unsplash




그렇게 10년 정도 치열했다. 아이들이 있으니 신혼 때처럼 살벌하지는 않았지만, 지성과 교양으로 열심히 포장해서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다. 그즈음에 나는 주민센터에서 '태극권, 기체조'를 수강하게 되었다. 그때 강사가 단전에서 손으로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는 동작을 시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단점을 알지만, 고치기 힘들죠? 다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기는 더 힘들어요. 타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기를 포기하고, 좀 더 쉬운 나를 바꿔보세요.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일 겁니다." 


우주의 기를 부르는 뫼비우스 동작 때문이었을까.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말이 나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래, 나도 내 생각대로 행동하기 힘든데, 내가 바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남편을 매일 원망하고 질책했구나.'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우리는 싸우지 않고 대화한다. 적어도 남편의 화를 돋우는 포인트는 건드리지 않는다. 나의 화를 돋우는 남편의 행동은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포기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를 화나게 하는 남편의 행동은 셀 수없이 많다. 그에 반해 남편의 화 포인트는 단순했다. 오로지 "내게 잔소리를 하지 말고 차라리 나가서 내 욕을 마음껏 해라."라고 말했다.     


그때 남편 대신 귀가 아프도록 내 하소연을 들어 주고 "동이 아빠가 잘못했네. 네가 애쓴다."라고 무조건 칭찬만 해 준 친구들에게 "고마워, 덕분에 치열했던 내 30대를 잘 넘길 수 있었어."라고 감사를 전한다. 


그 이후로 20년을 우리 부부는 휴전상태를 잘 유지하면서 함께 여행하고, 서로의 버킷리스트(크루즈 여행, 스위스 트레킹)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참! 내가 포기했던 남편의 행동이 올해부터 변화가 생겼다. 

'무조건 와이프 말에 복종하기!'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결혼 30주년이 되는 해고, 또 남편이 은퇴한 해이기도 하다. 남편의 변화로 인해 이제야 신혼생활을 누려볼 참이다. 30년 만이다!


가평 자라섬 6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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