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샘 Apr 26. 2024

작가 코스프레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

반복되는 일상에서, 가끔 꿈꿔 보는 비상구가 있다. 

발길 닿는 대로 가서 한 달간 살아보기다. 


제주나 바닷가 마을, 지리산 언저리나 멀리 타국의 도시까지 상상의 나래는 점점 규모가 커진다. 구체적으로 숙소도 알아보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도 계획하고 비용도 계산한다. 너무나 상세하게 사전조사를 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한 곳인데도 벌써 가서 살아 본듯한 느낌이 들어 시들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계획만 세우다 마침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살기 말고 며칠이라도 일단 실행을 해보자! 

그리고 지금 강릉 경포에 있다. 

'누구랑? 혼자다!'     



글짓기 동아리를 만들어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혼자 여행하기'도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가족들은 “엄마가 변했다.”라고 얘기한다. 하긴 스포츠 댄스를 배운다고 나팔바지 팔랑거리며 자이브 스텝으로 집을 나서질 않나. 주말에도 약속이 많은 엄마를 응원하지만 "혼자 여행해 보고 싶다."라고 했더니 큰애가 정색한다.


결국, 2박 3일, 남편과 함께 와서 어제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금 온전히 혼자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노트북 켜서 글쓰기, 마치 내가 작가가 된 것처럼 그렇게 하루를 살아보는 거다. 


세인트존스 발코니에서 찍은 경포해변 일출


7시 40분 일출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동지 때다)

어제도 이 자리에서 보았기에 해맞이도 여유가 있다. 해가 뜨기 전, 바람이 차갑기만 했는데 해가 떠오르자 뜨거운 태양의 손길이 피부에 닿는 듯하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서 해를 온몸으로 느끼고 심호흡을 한다. 동해의 한기가 온몸으로 퍼지면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듯 침대로 뛰어든다. 눈높이에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수평선 넘어 낮게 깔린 뭉게구름들은 3일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듯 몽글몽글 평온하게 보인다. 아마도 그 너머에서 시시각각 변화무쌍하였을 거다. 


먼바다의 옅은 쪽빛이 점점 짙고 깊은 쪽빛으로 변했다가 해변 가까이 올수록 에메랄드색으로 수심에 따라 선명한 띠를 만든다. 출렁이는 파도가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또 일어나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모래와 해후하며 하얗게 산산 조각나 산화한다. 


경포해변 겨울바다



해변에 홀로 걷고 있는 빨간색 롱패딩이 보인다. 나처럼 혼자 겨울 바다 느끼기를 실행 중인 여인일까? 저이 또한 얼마나 행복할까?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 마치 죽비로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면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게 있다. '아! 행복해'라고 고개를 젖히고 절로 눈이 감긴다. 


검은색 흰색의 바람 가득 들어간 롱패딩들이 하나가 되었다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둘로 쪼개진다. 쪼르르 모래사장 위를 펭귄 걸음으로 미끄러져 다닌다. 손을 맞잡고 호호 녹이고, 다시 포즈를 잡고 하는 모습이 좋을 때다. 저기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도 보인다. 파도를 따라 아슬아슬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보다 보니 나까지 행복해진다.  


1년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2박3일이 지났다. 아들의 노트북(게임용 노트북이라 너무 무거웠다.)을 빌려서 원하던 작가 코스프레도 하고, 젊은 연인들이 붐비는 맛집에서 혼자 밥 먹기도 했다. 강원도 겨울바람에 염색 안 한 흰머리는 산발이 되고, 주름 많은 얼굴은 해맑게 웃고 다녔다. 나를 마주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어! 머리에 꽃은 어디 떨어뜨렸나?’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루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코끼리와 태극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