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일이 다가오면 새벽에 눈 뜨자마자 그대로 이불속에 누운 채로 명상인지 멍상인지를 하며 떠오르는 대로 일단 끄적거려 본다. 어느 정도 채워지면 소리 내어 몇 번 읽어 본 후 이렇게 고쳤다가 또 저렇게 바꿨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다가도 결국 뭔가 마음에 안 들면 남편에게 어시스트를 요청한다.
제목을 불러주고 먼저 전체를 한 번 읊어준 후에 “바로 여기 이거야. 여기가 자꾸 걸려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나아? 저게 나아? 좋은 단어 있으면 추천해 봐요.”하고 내가 묻는다. 남편은 가만히 듣더니 그때부터 오며 가며 단어를 던져 준다. 그러면 나는 옳다구나! 하고 날름 받아 적는다. 한두 번이면 족할 텐데 외출해서까지 카톡으로 몇 번 더 연이어 떠오르는 단어를 보내준다. 남편은 계속 곰곰이 그 생각을 하나 보다. 남편이 보내주는 단어들도 물론 좋지만, 내 이야기를 시늉만 하면서 허투루 넘기지 않고 경청해 주고 함께 적절한 표현을 ‘찾아 맞춰주며’ 귀찮아하지 않고 끝까지 진심으로 노력하는 그 마음 씀이 더 좋다.
솔직히 나는 그렇지 못하다. 바로 앞에 있어도 친구들이나 독서모임 멤버들과 카톡 하느라 남편 이야기를 귓등으로도 안 듣고 귀찮아할 때가 많다. 남편은 내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려고 질문요법을 자주 쓰는데, 나의 인내심은 애진작에 바닥이다.
“왜 그렇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지치지도 않고 늘 내게 묻는다. 그런데 그 물음이 몇 수를 내다보는 통합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스스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질문이 너무 많다. 남편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이걸 매일 13년 넘게 겪은 나는 솔직히 피로하다. 스무고개 그거 하지 마! 묻지 말고 그냥 얘기해 줘. 남들은 안 겪어봐서 몰라서 그렇지 남편의 질문은 너무 고난도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싸움이 되지는 않고 나는 꿈벅꿈벅 송아지 같은 눈망울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남편을 쳐다볼 뿐이다. 답은 궁금하니까.
요즘 <고려거란전쟁>을 함께 보는데 때아닌 토론이 일어난다. 예전에 <선덕여왕>을 보면서 미실과 선덕여왕의 100분 토론 때도 그랬었지.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말한다.
“악이라! 범이 토끼를 잡아먹는다 하여 범을 악이라 칭할 수 있는 겐가? 태생에는 선악이 없소. 우린 정복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오. 우린 그 숙명을 따를 뿐이오.”
약육강식의 자연 생태계를 들먹거리며 거란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그럴싸한 그의 변명에 나도 어느 정도는 넘어갈 뻔했다. 그런데 남편이 아니라고 한다. 고려의 사신으로 온 김은부보다 더 단호하게 말해서 놀랐다. 거란은, 침략자는 만악의 근본 맞다고. 이번엔 내가 “왜에?”라고 물었다. 남편이 답한다.
우리는 범이나 토끼가 아니라 인간이니까.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는 것이니까. 그만큼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인성이 덜 된 것이라고. 그러니 소배압의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그의 논리가 맞으려면 동등하게 “범이 범을 잡아먹으면서” 선이니 악이니 논해야 하는 거라고.
“오~!”
나는 감탄한다. 옳고 그름이나 누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런 생각을 주거니 받거니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브레인스토밍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며 배우기를 멈추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 성장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단어 하나 물으려다가 어쩌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서 여기까지 왔지? 언제나 내게 논리정연하고 차분한 설명을 요구하는 말 잘하는 남편을 나는 못 이긴다. 그다지 이길 마음도 없다. 이길 필요가 뭐 있는가. 이미 가졌으면 됐지. 음하하.
아참, 지난번 글에서도 내가 “5일은 자영업자요, 2일은 직장인인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한참 고민하며 온통 ‘2’에만 꽂혀 있을 때, 둘은 “쌍”도 있다고 남편이 어시스트를 해준 덕분에 ‘오광쌍피’를 완성하기도 했었다.
어휘 도움받기! 어휘 도움닫기! 오며 가며 주거니 받거니 궁굴리는 사이 말은 더 맛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