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선물하는 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좋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읽고 쓰는 우리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친근하고 다정한 일상과 같은 일인데 굳이 뭘 또 글로 쓸 이야기가 있을까 싶기도 해서 서랍에 담아두고 조금 오래 묵혀두었다. 그러다 어느새 연말연시가 되니 서랍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며 마침내 살포시 꺼내본다.
내가 꺼낸 것은 글이 아니라 마음이다. 행복했던 순간의 그 추억을 고이 접어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과연 어떤 추억이었을까?
한 달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다. 교복을 입고 까르르거리며 몰려다니던 여고생에서 생활력 넘치는 원숙한 아줌마들이 되어 만난 우리들. 다들 여전히 부산에서 살고 있고 대학을 졸업하며 서울로 취직해 올라온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결혼 전에는 그래도 종종 서로 오고 가며 만나다가 대부분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에 집중하게 되면서 우리들 사이에 10여 년 남짓의 시간이 생략된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을 갈아 넣거나 상실하는 경험을 우리 모두는 지나온 것이다.
자유롭고 당당하게 빛났던 한 여자에서 엄마가 된다는 그 숭고한 과정을 통과해 온,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고 텅 빈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녀들을 만나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을까? 어쩌면 안타깝기도 하고 조금은 슬프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그 사랑을 어떤 언어로 표현해 주면 좋을까?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는 동안 나는 내내 행복하고 진지한 고민을 했다. 무슨 책을 선물하지? 책 선물이 가장 좋은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마땅한 책을 고르는 재미도 물론 좋았지만, 그 시간 동안 친구들을 실컷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보고파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못했던 만큼 곱빼기로!
나는 오래 고심할 것도 없이 보탄 야스요시의 신작 <여행하는 목마>를 골랐다. 내가 다니고 있는 동네책방에서 이 책을 직접 번역하신 나의 스승님, 김영순 선생님(강이랑 작가님)과 그램책수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책방지기에게 일곱 권을 주문해 두었다. 친구들에게 선물한다고 하니 늘 다정한 책방지기는 바쁜 와중에도 한 권 한 권 정성스레 포장을 해주었다. 물론 한 사람 한 사람 각각 다른 책을 선물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우리 모두가 같은 책을 한 권씩 소장하는 의미를 담아서 그림책으로 결정했다. 아이들도 함께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만남과 이별을 겪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거쳐 다시 만나는 우리들이기에 그 의미가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림과 색감도 예쁘고 이야기도 더없이 좋아서 안성맞춤이다.
책 좋은 것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굳이 그래도 꼭 한 번쯤은 책 선물이 특히 더 좋은 이유를 들자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꼭 맞는 맞춤 처방책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책은 종이로 된 문이기도 하지만 종이로 된 약이기도 하다. 부작용 걱정 없는 약! 그래서 나는 내가 읽은 책을 선물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아는 만큼 지금 그 사람의 상황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을 대신할 수 있는 책을 고른다. 물론 새 책도 좋고 내가 직접 읽으며 그었던 밑줄을 선물하기를 좋아한다. 같은 이유로 독서모임에서 책벗들이 읊어주는 자신만의 밑줄을 만날 때도 뜻깊고 행복하다. 제목이 될 수도 있고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책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어느새 이만큼이나 알고 있고 마음에 두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일이 더 의미가 크다. 책을 선물 받을 사람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헤아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거꾸로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이 짐작되니 또한 고맙고 감동이고. 책은 쌓아두기보다는 나누고 순환시키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그래야 또 새 책을 들일 수도 있고.
가끔 좋은 책 좀 추천해 달라는 너무 쉽고도 어려운 부탁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안 보이면 책도 안 보인다. 그 사람을 알아야 책도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좋은 선물은 그 사람에게 잘 맞는 선물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는 취향의 영역이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고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직접 자기 손으로 고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고 다양해서 고르기 어렵다고 한다면 안전하게 분야별 베스트 코너에서부터 접근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아무리 좋다고 추천하거나 선물한다고 해도 정말로 그 책을 읽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정말로 좋아하고 마음이 있다면 이미 읽고 있을 테고. 그래서 책 선물을 하고 나면 잊어버려야 한다. 한 번 떠나보낸 이상 인테리어 가구로 쓰든 냄비 받침으로 쓰든 베개로 쓰든 이제 그건 책을 선물 받은 그 사람의 소관이다. 묵혀두었다가 10년 후에 읽을 수도 있고, 아이가 대신 읽을 수도 있다. 읽고 물려줄 수도 있고 나눔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 선물해도 나는 기꺼이 좋다고 여긴다.
선물한 책을 읽고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며 참 좋았다고, 구체적으로 어느 구절이 무척 와닿더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당신이 좋은 것이다.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신뢰는 할 것이다. 물론 그 책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선물했기 때문에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 책을 고른 당신의 안목과 자신을 알아주고 마음 써 준 그 진심을 느끼고 믿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 '아, 이 사람이 추천한 책이라면 읽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직접 쓴 내 책을 선물하는 일이 어쩌면 가장 뜻깊고 기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 앞서 누구에게라도 이 책을 선물할 때 순간의 손길에도 마음에도 어느 한 구석도 망설임이나 부끄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경계하고 삼가는 것은 누군가가 다치거나 소외되는 일이다. 책으로 엮이기까지 하면 평생 남는 일인데 글이 칼이 되는 일이 없도록 거듭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마음이 앞서고 넘치거나 쏠리다 보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듯이 퇴고하듯이 말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하지만. 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축하해주며 말했다. "여운이 너답다! 잘 어울려."
책은 옷이나 지갑, 화장품 같은 선물과는 다르게 질리거나 상할 염려도 없다. 두고두고 읽고 다시 읽어도그때마다 새롭고, 세월을 머금을수록 오히려 의미와 가치가 깊어진다. 손때와 육필을 담아 유산으로 물려주기에도 더없이 좋다. 빈티지 중에 최고는 책이 아닐까? 초판 인쇄본, 저자 싸인본 등 오래되고 희귀해질수록 귀한 대접을 받는 예술 작품 중에 책도 한몫 톡톡히 한다. 아주적은 비용으로 누구나 예술작품을 소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심비 또한 최고가 아닌가.
책은 뜻밖의 인연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그리고 혈연, 학연, 지연에 비해 책연으로 맺은 관계는 시공을 초월해서 무궁무진하게 펼쳐지고 확장되기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안전하고도 변함없이 오래간다고 나는 믿는다.
좋아하는 시 중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 그대로 한 단어만 바꿔도 같은 의미가 되지 않을까? 책 한 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p.s. 쓰다 보니 너무나 당연하고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참 길게도 했다. 다가오는 연말연시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안부도 챙기고 맞춤 책 한 권씩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필사 콘테스트에 당첨되어 선물을 받았다. 펜과 노트와 책이 왔다. 한강 <희랍어 시간>이다. 두 권이 되었네. 이 절묘한 타이밍은 선물하라는 운명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