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산, 자기만의 봄

자기만의 방

by 햇살나무 여운


어느덧 마흔 중반이 되었다.


스물여덟, 모든 것을 버리고 빈 손으로 홀로 서기로 선택한 그날로부터 열일곱 해를 더 살아왔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은 피붙이들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두는 일이었다. 그 시작이었던 아주 작은 방 한 칸. 반지하는 아니었으나 볕이 들지 않았고 단열이 되지 않아 겨울이면 벽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릴 만큼 어둡고 축축한 주차장 방이었다. 말 그대로 누추했으나 감출 것도 꾸밀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의 형편이자 처지였다.


살아보니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다. 내 인생의 계절은 겨울 봄 여름 가을이다. 게다가 겨울은 유난히 길고 혹독했다.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참 지독히도 열심히 살았다. 땅은 척박했고, 호미는 물렀다. 파도 파도 끝이 안 보이는 듯 돌은 깊이 많이도 박혀 있었다.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씨앗뿐이었다. 정말 그랬다. 물려받은 좋은 씨앗이 나머지 모두를 이겼다. 씨앗은 살아남았다. 스스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굴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빛을 향해 볕을 향해 잎을 내었다. 잎은 비로소 날개가 되었다.



오늘의 나는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좋아서 하고 싶어서 손수 꾸민 내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게으른 시간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하루 몇 시간이고 앉아서 물감을 칠하며 생각을 멈추는 시간을 갖는다. 물감멍이다. 붓에 물감을 듬뿍 얹어 캔버스 위에 덧바를 때의 그 촉감이 참 좋다. 나는 지금 오래된 상처에 마데카솔을 바르는 중이다. 이런 걸 두고 치유라고 하나보다. 잘할 필요도 완성할 필요도 없이 그저 즐기다가 망쳐도 좋아서 더 좋다. 어디까지나 능동적인 나태함이다. 순간순간 내 안에 저 깊은 곳에서 불안감과 조바심이 솟구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깊은 새벽 오래된 공포와 불안이 꿈이 되어 덮쳐올 때가 있지만, 그러면 손을 뻗어 내 곁에 곤히 자고 있는 내 사람이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가장 효과 빠른 우황청심환이다.


지금의 쉼이나 여유가 경제적 윤택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꼭 큰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친절을 스스로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고. 행복은 지금이라고. 자신의 낭만을 잃지 말라고. 고난 속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내게 가르쳐 준 다정한 틈이다. 어쩌면 경제적 여유로움에서 누리는 낭만보다 결핍에서 찾는 낭만이 그래서 더 귀한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쓰고자 한 적은 없었다. 늘 살고자 했을 뿐이었다. 살기 위해 쓰는 날이 많았다. 쓰고자 하는 간절함만 있다면 자기만의 방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어디서든 어떻게든 쓴다. 그러다 큰 산을 만난다. 사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연민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내 이야기만 쏟아내듯이 거기에 매이고 고이고 머물러 있으면 나아갈 수 없다. 나로만 가득한 이야기는 포개어질 밑줄이 없다. '너'와의 교집합을 찾을 틈이 없다. 주어 I(나)를 버려야 진정한 자유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래야만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존중이라는 것을, 거기서부터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내 안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저항해야만 한다. 거리를 둘 수 있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상처든 상실이든 넘어서고 놓여나야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냥 이야기, 보통 이야기 말이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말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때로는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가 있건 없건 무슨 재미로 사나 싶을 만큼 그저 묵묵히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성실하기만 한 삶도 담담해서 더 깊고 고요한 위로가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이제는 그냥 쓰고 싶다. 더 이상 배설과 진통이 아닌. 아무 목적도 없이. 잘 쓸 필요도 없이.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없이 자유롭게. 쓰고 싶어서 쓰고 싶다. 쓰기 위해 사는 삶으로 옮겨가고 싶다.


이미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누리고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 잘 모르는 너무나 평범한 보통의 축복들이 있다. 이제 좀 살만 하다 싶어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운명은 또 언제라도 사정없이 귀싸대기를 날리고 허리케인처럼 모든 것을 순식간에 휩쓸어 앗아가기도 한다는 것도 겪어서 충분히 알고 있다. 겨울의 추위를 알기에 봄이 더 귀함을 안다. 삶의 고됨을 알기에 지금의 쉼이 더없이 값지다. 어제에 각인된 혹독함이 두려워 그렇다고 기어이 오는 오늘의 봄을 만끽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는 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생활인인가, 예술인인가 물으면 저울의 눈금이 조금은 더 이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매일 문학을 읽는 사람으로, 일주일에 두어 번은 꼭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것이 비록 무용한 것일지라도 나다움을 아름다움을 즐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사기 위해 충분히 정당한, 그러나 지나치지는 않은 성실한 값을 치르고 있다. 그것이 나의 삶의 태도이고 뿌리이며, 유연하지만 힘 있는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계절에 있나요? 하고 물으면 완연한 봄이라고 답할 것이다.



손그림



문학은
누군가의 옆에
가만히 서는 것입니다.



- 전영애 <괴테 할머니의 인생수업> 중에서 -





자기만의 방, 나의 19호실의 전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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