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즈 만들어 쓰는 여자
길고 긴 연휴 잘 보내셨나요?
오늘은 어버이날이네요. 카네이션을 그려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에요.
이맘때쯤 되면 저는 조금 꿀꿀해지거든요. 라디오 사연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네요. 어버이날이 누군가에게는 슬픔과 아픔이 도드라지는 날이 되기도 한다고 말이죠.
게다가 연휴 내내 일을 하느라 사실은 연휴 기분도 전혀 즐기지를 못했어요. 꿀꿀할만하죠?
그래서 저는 오늘 기분전환을 위해 꼼지락꼼지락 손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몽땅 꺼내놓고 만지작거려보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좀 보내려고 해요. 물론 세탁기에 빨래가 돌아가고 있고, 싱크대에 설거지가 한가득이지만 오늘은 파업을?!
꿀꿀할 땐 뭐니 뭐니 해도 문구죠! 어여쁜 신상 샤프펜슬 하나만 사도 행복하거든요. 식기세척기보다 문구!
나의 로망이라고 쓰고 욕망이라 읽는, 나의 최애들!
꺼내놓고 보니 많네요. 그런데 결코 이 모든 걸 하루아침에 다 산 건 절대 아니랍니다. 20년 가까이 된 취미이자 컬렉션이라고 해둘까 봐요. 너무 욕망 덩어리로 보이잖아요.
설마 저걸 다 쓰겠어요? 꼭 다 쓰려고 사지는 않죠! 책도 뭐 꼭 다 읽으려고 사나요? 일단 책은 사고 보는 거예요!! 아시죠? 허영심 충만! 낭만 충만! 책과 문구가 저에게는 보조배터리랍니다.
초록 잉크가 왈칵 쏟아지는 플래티넘 센츄리 C닙의 만년필인데요. 정말 부드럽고 종이 위에 궁굴리는 맛이 살아있어요. 그림 그리기에 너무 좋은 거 있죠? 3년쯤 마음에 두고 품고 품었다가 이번에 정말 큰맘 먹고 마련한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우겨보아요. (제가 가진 만년필 중에 제일 비싸답니다. 오매불망 몽블랑은 꿈도 못 꾸걸랑?)
제가 쓰고 그린 저의 원석이자 <명자꽃은 폭력에 지지 않는다>의 원류가 된 독립출판물 <여운상회>입니다. 한없이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사랑과 정성만큼은 가득하답니다. 거기에 어울리는 꽃 같은 책벗 펜갈피! 저는 글도 쓰고, 손글씨도 쓰고, 그림 꿈나무에, 굿즈도 만들어 쓰는 여자랍니다. 筆부심? 쯤 되려나요.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809313
색연필, 만년필, 연필, 샤프연필 등등등 세상의 모든 펜을 가지고 가져도 계속 갖고 싶다! 알고리즘이 사진을 읽고 새로운 펜을 계속 보여줘요. 저는 개인적으로, 형광펜은 스타빌로가 부드럽고, 만년필은 카웨코 제품을 좋아해요. 가격도 대중적이고 필기감도 무난하거든요. 라미 제품도 많이들 쓰시죠? 필사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만년필은 10년도 넘은 플래티넘이지요. 남편에게 각인까지 해서 선물했었는데, 바빠서 못 쓰고 방치되길래 제가 가져다 다시 잘 쓰고 있어요. 제가 바탕체나 궁서체를 좋아해서 주로 세필을 쓰게 되거든요. 아무래도 EF촉이 '여운체'를 쓰기에는 적당한 것 같아요. 끝이 둥글고 뭉툭한 C닙은 저절로 굴림체가 되고요. 연필은 누가 뭐래도 스테들러죠. 최근에 저는 코이누어(KOH-I-NOOR) 홀더펜을 애용하고 있어요. 볼펜은 BIC을 주로 씁니다.
문구 하면 스탬프와 마스킹 테이프를 빼놓을 수 없죠? 북마크도 워낙 예쁘고 다양해요. 솔직히, 바빠서 매일같이 다꾸를 한다거나 그다지 자주 쓰지는 못해요. 예뻐서 모셔 두지요. 이 아이들의 가장 첫 번째 쓸모는 심신안정입니다. 나의 우황청심환, 종합빛타민, 나의 박카스!!
책벗 펜갈피! 한 번도 안 쓴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쓴 사람은 없답니다. 본업이 바빠지면서 방구석 가내수공업을 할 여력이 안 돼서 요즘은 거의 못하고 있어요. 밖에서 체력을 다 쓰고 오니 이제는 눈이 침침해서 바늘 구멍도 안 보이고, 실도 안 보이고, 관절 마디마디가 쑤셔서 슬픕니다. 정말 모든 것은 체력입니다. 핸드메이드 제품 비싸다고 여기지 마셔요. 어쩌다 취미로 한두 개는 만들 수 있는데, 같은 제품을 일정하게 수백 번 만들어 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의외로 ADHD인 저로서는 빨리 지치고 싫증도 금방 내는 편이라서요. 게다가 손바느질은 물론이고 재봉틀 작업은 골방에서 골병들기 딱 좋아요. 어디까지나 좋아서, 하고 싶어서 딱 그만큼만 합니다.
요즘 온라인서점마다 북커버니 북파우치니 워낙 핫하더라고요. 사고 싶은 마음이 넘치면 가끔 그냥 만들어 봅니다.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꼼지락거리는 동안 욕망으로 들끓는 마음을 잠재우고 금세 잊어버릴 수 있거든요. 이것도 딱히 쓰려고 만드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렇게 어설픈데, 여기저기 나눠주는 걸 좋아해서. 그래도 자꾸 눈에 아른거려서 갖고 싶다? 그럼 사야죠, 뭐. 가끔(자주?) 사기도 합니다.
필사를 하다가 가끔 그분이 오시면 손그림을 그려요. 너무 감사하게도 편집자님께서 책에 그림을 넣어보는 건 어떠냐고 물어봐 주셨는데, 아직은 낙서 수준이고 일정한 그림체를 갖지는 못해서 이번엔 욕심을 접기로 했어요. 주제를 알고 욕심을 접을 때를 알아야죠. 다 넣으려다 오히려 망치면 안 되니깐, 절제의 미를 살려서.
그림을 그릴 때는 만년필도 많이 쓰지만,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 또는 펜텔 트라디오 펜이 좋더라고요. 그림 그리시는 분들은 이미 많이 쓰고 계시는 아주 유명한 펜이기도 하지요. 그림 그리기 좋은 노트는 하네뮬레 워터칼라북 수채화노트 A6를 추천드려요. 두께감이 있어서 비치거나 번지지 않고, 포켓 사이즈로 휴대하기도 좋아요. 종이질감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에게는 꽤 비싼 노트이긴 합니다.
꽃이나 나무 같은 자연물을 제외하고 인간이 만든 물성 중에서 제 눈에는 세상에서 책과 문구가 제일 예뻐 보여요. 밥은 잘 못 먹는데, 종이와 펜은 질리지가 않네요. 늘 좁고 엉망진창인 책상 위가 저의 최고의 성소(聖召)이자 놀이터이며 아지트예요. 늘 여기서 쉬고 놀아도 충분한 집순이여서 그런지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나 봅니다.
그동안에 쌓아올린 저의 욕망을 대방출 해보았네요. 참 예쁘죠?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소가 잠시 쉬는 안식처 또는 피난처를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하죠? 비록 한 뼘의 노트 위, 다섯 뼘의 책상 한 칸일지라도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충전하고 회복할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자신만의 성소를 지니고 자신답게 자신을 닮은 이름을 붙여 보아요. 꼭이요. 그곳에서 끄적거린 몇 줄이 모이고 쌓여 언젠가 책이 되기도 한답니다.
삶은 결국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말할 줄 알게 되는 하나의 과정이므로.
- 정혜윤 <삶의 발명>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