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약이 된 기다림
작년 10월,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맺고 도장도 찍고 계약금까지 받고도 저는 솔직히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답니다. 제게는 뜻 밖에도 기대치 못한 너무나 큰 행운이었어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아서 마치 없었던 일 같기도 하고, 마치 남의 일인 듯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계약 후 반년 가까이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마치 계약이 없었던 일처럼 조용했지요. 아, 편집장님께서 언제든 편하게 원고를 더 써서 보내도 된다고 통화는 하였지요. 제가 경험이 없고 잘 몰라서 계약하고 책이 바로 금방 나오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출판사들이 대부분 연간 계획이 잡혀 있다고 하네요.
저는 평소대로 생업에 매진하며 조용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일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내 책이 정말 나오긴 나오는 걸까?' 스스로를 의심하며 조금 지쳐가기도 했었나 봅니다. 출판사를 못 믿었나 봅니다. 아니다. 제 자신을 못 믿었던 거겠죠. 출판사를 믿으세요! 믿고 넉넉히 기다립시다, 우리.
과연 내 글이 그만큼 될까? 책으로 나올 가치가 있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저 역시 반 년 동안 떠나보낸 원고는 완전히 묻어두고 쳐다도 안 봤답니다. 이미 한 편 한 편 쓰고 고칠 때마다 열 번 스무 번도 더 읽잖아요. 거기서 그만 물러나서 빠져나와야만 했어요. 반드시 필요한 과정과 시간이라는 생각이 지나오니 더 명확해집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마침내, "오! 나의 편집자님!"도 왔습니다.
담당 편집자님과 함께 한 달여 동안 주거니 받거니 3교까지 해봤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약속한 날까지 마감은 칼같이 지켰습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저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이들이 불편해지면 안 되니까요. 대부분의 인용은 모두 빼거나 줄이고, 좀 더 이야기를 늘린 곳도 있고, 디테일의 정확도를 높인 부분도 있었고요. 기억이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꼭 필요한 때가 되니 생생하게 되살아나지 뭐예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입니다.
누름돌의 지혜가 제대로 발효가 되어 맛있게 익었습니다. 글이요? 아니요. 제가요. 그 사이 제가 조금 달라진 것일까요? 글이 다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거리 두기가 조금 가능해진 것일까요? 처음엔 뭔가 들뜨고 어설퍼서 착 감겨오는 맛이 없고 계속해서 내내 걸리던 꼭지는, 반년을 지나오고 보니 다시 쓸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더 괜찮은 어투로 바꿔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뒤늦게 빠뜨리지 않고 추가로 넣을 수도 있게 되었지요. 그 길목마다 편집자님의 적절한 길라잡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설익고 풋내 나는 자신이 숨이 좀 죽고 잦아들어 무르익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충분히! 처음엔 조바심을 못이기고 반강제적인 기다림이라고 여겼었는데, 더 괜찮은 글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은 덕분이겠지요. 계속 삶을 살고, 계속 삶을 쓰고,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고 다시 거듭나기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주저앉고 구겨지고 더럽혀지고 해도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그 너머의 가치를 잃지 않고 걸어온 덕분일 겁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내는 것'에 기뻐함과 동시에,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책임과 두려움의 무게까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일상은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고,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제 자신은 아니까요.
물론 여전히 잘 되지는 않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다 쏟아내고 나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버리고, 다른 이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얘기만 하느라 바쁘면 안 됩니다. 다른 이를 받아들일 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글쓰기는 나를 죽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살도 빠지고 이도 또 하나 빠질 것 같은.... 힘들지요. 당연히 힘듭니다. 쉽게 되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그렇지요?
이제 5일 남았습니다. 설레는 기다림!
책과 사람을 잇는 어느 다정한 순간의 기록!
서울국제도서전에 오시면 꼭 한 번 들러주세요! 6월 18일부터 코엑스 B1홀 S11에서 만나요!
#서점일기
#티라미수더북
#여운
p.s. 초고가 되었던 글들은 가능하면 모두 거둬들여한다고 해서 브런치북에 오픈되어 있던 나머지 글들도 닫아두게 되었습니다. <발행 취소 글>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아, 이 모든 시작의 시작은 브런치에서 "에디터 픽 신작 브런치북"에서부터였답니다. 그러니, 브런치 작가님들! 우리 모두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