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Smart!
어디 가서 진단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요즘 정말 내 모습이 낯설다. 어디 나사 하나 풀리다 못해 빠진 사람 같다.
하루는 잠시 볼 일이 있어 남편 차를 같이 타고 나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보니 지갑이 없었다. 책도 있고, 다이어리도 있고, 필통도 있으면서 지갑이 없었다. 다른 작은 가방에 넣어두고서 깜빡 까먹고 그냥 나온 것이다. 현금도 당연히 없다. 다행히 휴대폰은 있었다. 휴대폰만 있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도, 아직 한 번도 휴대폰으로 태그하고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었다. 지하철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여전히 꼭 실물카드를 들고 다니며 결제를 하는 사람이다. 물론 아주 가끔 휴대폰 속 디지털 월렛(?)에 무슨 페이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실물카드를 선호한다. 그래야 더 안심이 된다.
날도 저물고 추워지는 데다가 곧 눈이 올 것 같아 다급히 휴대폰을 열어 방법을 검색해 본다. '휴대폰 카드로 버스비 결제?'라고 물으니 무슨 어플을 설치하고, NFC를 켜라고 나온다. 질문에 공짜는 없다. 방금도 나는 데이터를 꽤 소비했다. 요즘은 단어 하나만 검색해도 AI가 먼저 튀어나와서 답을 한다. 나는 그냥 사전이 보고 싶은데...
방법을 찾은 후 잠시 안도하는 사이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마침 도착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고 노련하게 휴대폰을 단말기에 가져다 댔는데, 이런! 오류가 난다. 왜?! AI가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몹시 당황스러웠다.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니 기사님께 "죄송합니다, 잠시만요."하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다시 이것저것 만져보고 지워보고 펼쳐보고 맨 마지막에 겨우 버스비를 결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뭐라고 땀이 삐질삐질 나고 심장이 콩닥거린다. 30초가 30분 같았다. 아무도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서 차마 뒤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맨 앞쪽 가장 가까운 손잡이를 잡고 섰는데, 마침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슬며시 웃었고, (그런 내 모습을 가까이서 다 지켜본 게 분명한) 아이는 내가 조금 안쓰러운 눈빛이다. 두 정거장도 못 가서 아이가 내릴 모양이다.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
다행히 양보를 해야하나 주변을 살펴야할 정도로 버스가 붐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잘 보였겠지? 티 났을까? 다 들켰겠지? 이런 엉성하고 바보스러운 내 모습을... 집 안에서 배 깔고 누워서 온라인 쇼핑은 빛의 속도로 잘만 하더니 꼬숩다! 그러고도 혹시 내릴 때 또 오류가 나지는 않을까 오는 내내 휴대폰을 손에 펴 들고서 화면이 꺼지지 않게 계속 확인하며 노심초사했다.
이참에 나를 갱생시키려는 모양이다. 곧이어 이번엔 택시다. 다음날 새벽 남편과 함께 차를 두고 지방에 잠시 다녀올 일이 생겼다. 아직 별초롱초롱 빛나는 캄캄한 새벽, 번화가도 아닌 집 앞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기란, 아니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요즘 누가 택시를 잡아 타나 불러 타지! 나는 택시를 타지 않는 사람이다. 굳이 택시 탈 일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여럿이서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혼자서 택시는 타지 않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번엔 검색하지 않아도 카카오택시는 알고 있어서 바로 휴대폰을 열어 어플을 설치했다. 목적지를 입력하고 부르는 것까지는 익숙하게 했다. 택시 한 대가 열심히 달려오는 그림이 실시간으로 보인다. 아니, 그런데 택시비까지 알아서 어플에서 결제가 된다고 택시 기사에게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눈뜨고 500원을 떼어 간다. 나는 기사님께 직접 결제하고 싶다고! (오늘은 지갑도 카드도 잘 챙겨나왔는데...) 기사님도 수수료를 물고 계시겠지? 편리함을 대가로 쌍방에서 뜯어가는구나. 우리는 진정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 사방팔방 CCTV와 블랙박스, 어플 덕분에 먹튀는 예방할 수 있겠다. 여전히 간혹 뉴스에 나오는 주취자의 묻지마 폭행은 가림막이 있어도 못 막겠지만.
다음은 고속버스다. 평소에 지하철과 기차는 친숙하게 이용하고 있다. 예전엔 코레일에서 예매를 했었는데, 지금은 네이버지도 어플에서 곧바로 기차예매까지 하고, 기차는 지금껏 한 번도 승차권을 검사한 적이 없다. 입석이나 장애인이 아닌 이상 노룩패스! 그러나 나는 불안해서 캡처까지 해놓고, 혹시 몰라 카톡에 공유까지 해놓는 사람이다. 아무리 모바일 발권이래도 굳이 종이로 인쇄까지 해야 안심이 된다. 혹여라도 다 사라지고 날아가버리면 어떡해?!
어쨌든, 아주 오랜만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첫차를 탔다. 버스표도 미리 휴대폰으로 검색하고 예매를 해두고 역시 마찬가지로 캡처해서 남편과 공유했다. 이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종이티켓을 뽑고 싶었는데, 이제는 기어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어둑어둑 차가운 겨울 새벽 공기 속 첫차를 타는 설렘도 잠시, 버스에 올라타는데 또 단말기가 서 있다. 캡처화면 구석에 콩알만 한 QR코드를 대니 띠리릭 작은 종이조각이 튀어나온다. 나는 키오스크가 뱉어낸 번호표를 받듯 반사적으로 그 종이티켓을 뜯어 챙기려는데, 기사님이 말씀하신다.
"그건 제 거예요."
민망함이 급습해 온다. 아직 24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내버스에서의 나의 바보스러움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하자. 나는 결코 스마트한 인간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나는 실물이 있고 종이를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될 뿐이라고. 극장에 가서도 굳이 종이티켓을 인쇄하는 사람이라고. 스타벅스 가서도 남들처럼 세련되게 사이렌 오더 이런 거 못하는 사람이라고. 시키는 메뉴도 늘 정해진 두세 가지!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그래도 스타벅스는 여전히 사람이 주문을 받아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키오스크 난도가 가장 높은 배스킨라빈스 써리원은 안 간지 오래됐다고. 선물 받은 아이패드가 있어도 겨우 음악만 듣고, 굳이 챗GPT에게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인스타그램에 온갖 기능이 있어도 여전히 어렵기만 한 나는 그냥 납작하고 단순한 아날로그형 인간에 불과하다. 여전히 실물카드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하고 종이와 펜을 늘 들고 다녀야 안심이 되는 내가, 촌스럽대도 할 수 없다. 이어령 선생님이 '디지로그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무래도 글러먹었다.
익숙한 생활패턴과 반경을 오랜만에 아주 잠시 벗어났을 뿐인데, 마치 한 발자국도 안 뗀 채로 해외여행패키지라도 다녀온 것처럼 낯설고 놀랍고 당황스럽고 지친다. (사람은 이래서 여행을 자주 다녀야하나 보다. 번거롭고 낯선 환경에 나를 자꾸 던져넣어야 한다. 그래야 뇌가 긴장하지.) 이제껏 꽤 똑똑하고 스마트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좁은 범위에서 딱 필요한 만큼, 안전하다고 느끼는 만큼만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야 물론 하려고 하면 못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미 몹시 피로하다. 새로운 변화가 피곤하고, 이 속도가 두렵고, 나 자신이 너무 좁고 얕고 뒤쳐진 인간처럼 한심스럽고, 갑자기 폭싹 늙어버린 기분이 드는 게 이상한 걸까? AI 말고 사람이 맞이하고 답했으면 좋겠고, 온라인 만남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오프라인 만남이 여전히 좋고, 서툴고 느리고 세련되지 못해도 눈총 받는다 여기지 않고,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지 않고 그래도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내가 구닥다리인 걸까?
몇 달 전 아파트 욕실 타일 보수를 해준 적이 있는 의뢰인께서 이번에는 자신이 소유한 오피스텔 수리를 요청해 오셨다. 지난번 작업 결과물이 꽤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세부 사항 조율을 위해 통화를 하고 약속을 확정한 후 의뢰인이 사진 한 장을 문자로 보내오셨다. 직접 손으로 쓰고 그린 필요사항과 약도였다.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손편지라도 받은 것처럼 반갑고 다정했다. 있을 건 다 있는 약도는 또 얼마나 든든하고 귀엽던지! 오피스텔의 특성상 거주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고 주차비도 유료이니 그 점까지 미리 고려해서 상세하게 적어주시고 챙겨주신 매우 꼼꼼한 친절이었다. 이런 친절이 꽤 오랜만인 듯 아득하고 아련하다. 그러고 보니 AI가 인간과는 다르게 한결같이 친절한 것 한 가지는 마음에 든다. 비록 온기는 담기지 않은 차가운 친절이라도.
그랬다. 카톡이 없고, 네이버 지도가 없고, 당근이 없고, 페이가 없고, 쿠팡이 없어도 우리는 잘만 살았다. 그것들 없이도 우리 인간이 지닌 센서와 센스만으로도 충분히 서로 더 잘 주고받고 오며가며 묻고 나누고 돕고 눈맞추고 대화하고 이해하며 끄떡없이 더 오랜 세월 잘 살아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는 무척 편리해지고 시간도 단축되고, 우리가 보는 세상도 더 넓어졌는데, 그렇게 남은 시간들을 다시 죄다 스마트폰에 지불하고 있는 것만 같고, 사람 사는 세상은 왜 더 좁아지고 멀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나는 왜 자꾸만 퇴화하는 기분이 들어 불안한지.
주말 오후 다음 스케줄은 17층 아파트 수리 견적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약속 시간에 딱 맞춰 하필 엘리베이터 점검을 막 시작하는 참이다. 어쩔 수 없지, 뭐! 걸어야지! 다행히 견적만 보러 가는 길이라 가방이 가볍다.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계단이 있고, 우리는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다. 아무렴! 고칠 수 있는 손이 있는 덕분에 우리는 먹고산다. 이 당연하지만은 않은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아날로그 인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