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맛
추위와 피로로 점철된 조수는 얼었다 녹았다 수분이 다 빠져 쭈글쭈글하고 퍽퍽한, 유통기한 한참 지난 두부가 된 기분이다.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 같은 영혼을 종이와 잉크로 애써 축여보지만 효과는 그닥 미미하다. 무말랭이는 무치면 맛있기라도 하지! 조수는 점점 맛없어지고 있다. 더 맛없어지기 전에 어서 봄이 와야 할 텐데. 막 입춘이 지났으니까 곧 오겠지. 꼭 오겠지!
차별과 불의에 자주 쉽게 피가 끓는 조수의 정신은 여전히 노동계급이다. 심장이 그래도 아직 젊은가봐? 우리는 흔히 책에서 배운 대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고 고매한 척 말은 하지만, 현실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커터칼날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다. 집수리일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낡고 허름하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에 자주 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곳'에 몸담고 있으면 사람도 '그런 사람'일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일까? 노동 현장의 일선에서 인간의 밑바닥 또한 그만큼 더 일찍 더 자주 마주한다. 모든 태도와 행동은 자신들의 무의식을 숨기지 못한다. 처음에 잠시 썼던 가면도 얼마 가지 않아 이내 벗겨지고 만다. 인간답게 존중하고 대응할수록 본색을 드러내는 그 속도는 더 빨랐다. 몰라서 그렇다고?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시해서 그런 것이고, 무치(無恥)해서 그런 것이다. 조수가 자꾸만 인간의 맛을 잃어가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너무도 자주 만나는 평범하고도 흔한 보통의 얼굴들과 그 얼굴을 마주하고도 먹고살겠다고 못 본 척, 모르는 척해야 하는 나의 얼굴이 겹쳐져 가증스러울 때가 많다. 그나마 세월 속에서 사회화된 외피가 제법 두꺼워서 다행이다. 그렇다고 당장 떠밀려오는 하루하루의 삶에 피할 수도 멈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필연적 현실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타이레놀 대신에 모욕을 한 움큼씩 집어삼키고 이를 악물고 버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 그리고는 몸소 피부로 마주한 실체와 민낯의 괴리로부터 조수는 여전히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분기탱천하고 있는 조수 옆에서 사수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한다.
"뭘 그렇게 아직도 매번 감정적으로 반응해요?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그러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라는 고대 함무라비 법전의 가르침도 거뜬히 초월하고서는 흔들림 없이 한결같은 무념무상의 손끝을 빛내는 사수가 때로는 참 야속하다. 인간미(美 아니고 味) 없게! 사수의 손끝에는 감정도 차별도 없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저 자신이 맡은 일에 늘 똑같이 최선을 다해 임하는 자세는 기본이고 손끝에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싣지 않는, 결코 긁히지 않는 다이아몬드 공구에 버금가는 경지는 되어야 진정 고수라고 할 만 한가? 우리가 마주하는 현장은 굳이 나서서 확인하지 않아도 늘 막장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다 보고 다 겪고 알되, 그것을 뛰어넘어 같은 수준으로 응수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우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고 성숙일까? 결국 직면하고 뛰어넘어야만 자신의 도량을 확장시킬 수 공부가 되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가슴까지 너무 멀어서 그렇지. 아직도 갈 길이 참 멀다. 조수는 거듭거듭 깨지느라 아프다. 깨지다 보면 닿는 날 오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사수가 내 스승이어서.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 없던 사수의 손이 내 유일한 믿을 구석이자 비빌 언덕이어서. 언젠가는 사수처럼 내 손끝에도 의연함이 배어드는 그날이 오기를.
비록 조수의 괴로움은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지만, 그 고뇌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존귀함과 품위는 집 평수, 학력, 직업, 재력, 사회적 지위, 들이켠 먹물의 양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는 진리만큼은 어느 시리디 시린 겨울 새벽 샛별처럼 비로소 선명해졌다. 인성은 별개다. 모두 제각각 사람 나름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나를 결정짓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지 않는' 나의 선택이겠지. 몸은 종종 누추한 곳에 머물고 손은 더 자주 누추해지지만, 영혼까지는 누추해지지 않으려 인간에 대해 마지막까지 지키고픈 이 한 줌 낭만을 위해 조수는 오늘도 혼자서 괜히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