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수리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을 가끔 돕는 시늉을 하는데, 오늘 작업에는 제대로 손이 필요할 듯해서 반려자 아니고 반려손! 반려 조수로서 따라나섰다. 남편은 못해도 24K 금손쯤은 된다. 나는 금손까지는 아니어도 서당개 10년이면 천자문을 외운다고 나름 ‘동(銅) 손’에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 ‘똥손’ 아닙니다. 된 발음 주의해 주세요.
오늘의 미션은 아파트 작은 방 베란다 바닥 철거 공사였다. 견적 의뢰로 먼저 받아 본 사진에서도 매우 심각해 보였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직접 보니 일이 더 커 보였다. 현장이란 그렇다. 실상이 더 심각한 경우도 허다하고, 이런저런 변수가 참 많다. 고객님은 이미 몇 군데서 연락도 없이 퇴짜를 맞고 속이 많이 상하신 듯 보였다. 우리는 해볼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는 건 고객님도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비즈니스 모드 ON이다. 평소에는 감성 모드로 소녀처럼 앉아서 이쁜 찻잔에 커피 내려 마시고 글씨나 끄적이면서 ‘이런’ 일은 전혀 못 할 것처럼 보이는 나는 닥치면 의외로 안 가리고 뭐든 한다. 아무리 힘들고 무겁고 어렵고 더럽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일이 되면 달라진다. 집에 있을 때는 눈에 띄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던 바퀴벌레도 오늘 같은 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뿐히 '즈려'밟기도 한다. 남의 돈을 받는 순간 프로가 되는 것이다. 생존 앞에서 가릴 게 무엇이겠는가? 이럴 때는 밑바닥 경험치가 여간 쓸모 있는 게 아니다. - 화장실은 좀 OFF가 되면 좋으련만, 현장에서 가장 난감한 건 의외로 생리현상이다. -
예전에 엄마가 병원 중환자실에 계실 때였다. 그곳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너무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곧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을 가지고서는 그런 곳에서는 단 하루도 버티기 어렵다는 걸. 일 앞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잠시 꺼두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걸. 나중에 병원비 내역서를 받았을 때 모든 처치 하나하나에 다 값이 매겨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럽고 어렵고 위험하고 손대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값을 치르는 것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혐오 수당’쯤 될까? 그만큼 철저히 냉정하게? 냉철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의 자세이자 예의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노련해지면 그 ON, OFF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경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존경은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못 할 것 같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할 것이다. 토끼의 간처럼 마음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지 않는 한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무리다.
남편이 위험하고 힘과 기술을 요하는 일을 처리할 동안 나는 옆에서 붙잡아 주거나, 적절한 도구를 챙겨 주거나, 사진도 찍어주고, 쓰레기를 처리한다. 폐기물 봉투 여섯 자루를 가득 채웠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매의 눈을 뜨고 튀어나온 못은 없는지, 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쌓인 곳은 없는지 끝까지 한 번 더 살피고 꼼꼼하게 마무리를 한다. 다 철거하고 보니 에어컨 구멍 자리가 휑하니 뚫려 있어 서비스로 실리콘 마감을 해드렸다. 마지막으로 빗자루로 전체 먼지를 한 번 쓸어내고 장비를 갈무리한 후 뒤를 돌아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꼭 돌아본다. 이것은 모든 일의 마지막 순간에 가져야 할 정말 중요한 삶의 태도이다. 잊지 말자.
일이 마무리된 후에 고객님께 보여드리고 확인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처음과 중간에 한 번 더 설명하고 보여드리고 의견을 묻는 소통과정도 무척 중요하다. 현장에서 손발이 잘 맞는 것도 좋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소통을 잘하면 시행착오와 실수도 예방할 수 있고 훨씬 수월하다. 그리고 가능한 손을 댔을 때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은 이왕이면 최대한 해드리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한다. 길게 보면 그게 서로가 돈을 버는 일이다. 내 집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이 모든 건 남편이 하고, 나는 어디까지나 반려입이 아니고 반려손이기 때문에 조용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배우며 끄덕끄덕 공감하기까지만 한다. 안다고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낄끼빠빠' 센서는 ON이다.
일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세면대든 변기든 어디든 필요할 때는 무릎도 꿇어야 하고 엎드려야 하고 밑에 들어가 드러눕기도 해야 하는 우리 집 가장의 현장은 어쩌면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슬픈가? 아니, 숭고하다.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드높은 순간이다. 밥벌이란 이 얼마나 눈물겹게 아름다운가. 피, 땀, 눈물에 괜히 밥 말아먹겠는가. 더 큰 문제는 내가 재미를 느꼈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번 느끼는 사실이지만, 나는 일을 좋아한다. 일이 몹시도 하기 싫기도 하지만, 동시에 몹시도 하고 싶다. 인간은 어차피 다중인격에 모순덩어리!
돌아오는 길에 점심으로 삼계탕 사줬다. 내 카드로 긁어서. 오늘의 일당은 안 받겠다고. 나는 어디까지나 아직 인턴 반려손이니까. 그런데, 반려손이 입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