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보다 심력(心力)

노안에 대하여

by 햇살나무 여운

안경을 새로 맞췄다. 거의 3년 만인 것 같다. 시력 검사를 하면서 안경점 아저씨가 렌즈의 수명은 보통 1년이라고 알려 준다. 안경을 벗으면 거울도 못 보는 나는 사실상 안경이 내 눈과 마찬가지이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가까운 생활밀착형 사물이다. 가장 많이 쓰는 만큼 중요한 걸 알지만 한 번 맞추려면 마음을 먹어야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내 눈과 얼굴에 맞게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맛도 있어서 새로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시력이 떨어질 만큼 떨어져서 변화도 거의 없고 해서 그러려니 하면서 제법 오래 썼는데, 최근 들어 책이나 컴퓨터를 볼 때 흐릿하고 잘 안 보이기도 하고 쉽게 피곤해짐을 느꼈다. 많이 보는 까닭도 있었겠지만, 안경사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노안이라고. 그리고 나는 특히 야간 시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그래, 맞아. 난 밤눈이 참 어두웠어. 그래서 영화가 시작한 후에 깜깜할 때 극장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왼쪽과 오른쪽 시력이 차이가 크게 나는 편이다. 왼쪽 눈은 사실상 거의 안 보인다. 양쪽 눈이 서로 너무 차이가 크게 나면 어지러울 수 있다고 해서 더 잘 보이게 높이지는 않고 편안하게 보이는 쪽으로 선택했다. 오랜만에 새 안경을 맞추고 나오니 밝고 선명한데, 몹시 어지럽다. 며칠 더 적응을 해야겠지.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노안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노안은 생로병사와 필연임을 모르지 않았는데, 전문가로부터 명확하게 듣고 나니 새삼스럽게 서글퍼진다.


예전에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나 어르신들의 휴대전화 글씨가 워낙 커서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멀찌감치에서도 다 보여서 민망해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러고 있다. 글씨 크기도 키우고, 컴퓨터 화면 비율도 120%로 해 놓고 본 지 한참 되었다. 노안은 생활 속에 생각보다 일찍 찾아와 있었다. 어제는 슈퍼블루문이라고 방방곡곡에서 달구경을 하느라 들떠 있었는데, 시력은 나빠도 카메라 기술이 워낙 좋아서 사진으로 달의 무늬까지 더 잘 보인다.


커진 글씨 크기만큼이나 목소리도 커졌다. 내가 잘 안 들린다고 상대방도 잘 안 들리는 줄 알고 자꾸만 자꾸만 목소리가 커진다. 그런데 정말 안 들리는 것은 전화나 TV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가 아닌가 싶다. 안 들리는 게 아니라 안 듣는 것이다.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기처럼 너무 당연하고 익숙해져 버려서 생활 소음쯤으로 여겨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도 남편이 왜 자기 말을 안 듣느냐고 한바탕 큰소리를 냈다. 나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남편은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왜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느냐고 하고, 나는 왜 하필 지금 바쁜 이 아침에 그 이야기를 하느냐고 구시렁거렸다. 우리는 왜 강하고 센 어조로 이야기해야만 들어 ‘먹는’ 것일까? 눈 맞춤을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에는 이제 시력도 청력도 따라주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집안에서도 각자의 방에서 카톡으로 대화를 해야 할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력이나 청력이 나아질리는 만무하겠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봐주고 들어주는 심력(心力)은 더 깊어지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반성을 해본다. 하루도 못 가서 금세 잊어버리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자께서 나이 60세를 이순(耳順)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눈도 어두워지고 귀가 순해지는 까닭은 어른이 되면 봐도 좀 못 본 체하고, 들어도 좀 못 들은 체하며 순하게 넘어가 주라는 삶의 지혜를 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밖으로만 향한 눈과 귀를 자신 안으로 좀 돌려 마음을 좀 살피라고. 저절로 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해져야 한다고. 당연히 잘되는 것을 그 어려운 책에 써 놓았을 리 없고, 그만큼 어렵고 쉬이 되지 않으니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그 오랜 고전에 새겨 놓으셨을 것이다.

안경 하나 맞추고 너무 멀리 왔다. 이순은커녕 아직 지천명(知天命)까지도 한참 남았다. 그래도 눈이 좀 더 어두워졌으니 그만큼 좀 더 넌지시 보아주고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그런 아량을 갖추어야 할 텐데. 마음은 왜 눈을 감아야만 더 잘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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