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대리한 절대자가 아닌 우리 곁에서 같이 고민하는 사람, 교황 이야기
교황을 사임한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함께 맥주를 마시며 월드컵축구 아르헨티나 독일전 중계방송을 본다. TV를 보면서 서로 약을 올리고 고성을 지른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온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다. 교황청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경기를 관전하지 않고 결과만 보고받았다고 하며,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일찍 숙소에서 숙면을 취했다고 한다.
2019년 12월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두 교황'(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리스)은 교황도 한 인간임을 보여주는 영화다. '교황 사임'이라는 극적인 실제 사건을 매개로 주변 상황에 상상력을 덧붙인 이야기다. 여기에 다큐 필름처럼 보이도록 움직인 카메라 워크와 자료 영상이 덧붙여져 영화 전체가 마치 실제 사건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배우:앤서니 홉킨스)가 물러나기 전 그다음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베르고글리오(배우:조너선 프라이스) 추기경을 만나 서로 나눈 대화가 영화 전반을 채우고 이끈다.
사실상 늙은 두 남자가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심오한 철학과 종교,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충돌하면서 아름다운 불꽃을 일으킨다.
교황 사임, 나이나 건강 때문이라 믿기 어려운 이유 / 프레시안
719년 만의 교황 사임, 진짜 이유는? / 한겨레 21
이제 밝힌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사임 이유는? / 가톨릭 평화신문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인 베르고글리오(교황 프란치스코)가 추기경 사임 결재를 받기 위해 로마로 온다. 편지를 여러 번 보냈으나 답장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찾기 위해 비행기표를 구입하니 때마침 로마로 오라는 내용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편지가 도착했다. 교황의 별장에서 첫 만남이 이뤄졌다. 교황은 사직서를 내려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의 서류를 본체만체하거나 딴소리를 하면서 넘긴다.
만남은 로마 바티칸으로 이어졌다. 관광객들이 들어오기 전인 이른 아침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만난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말한다.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면서.
"가끔 아주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요. 아주 이상해요. 어느 날 밤 기도 후에 촛불을 껐는데 연기가 위로 오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더군요. 주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거절했을 때처럼 말이오. 그런 일이 눈에 들어온 적 있소?"
"교황님께서 오라고 하시기 전에 여기 오는 비행기표를 이미 구입했었습니다."
"그 말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당신이 적임자요. 난 물러나겠소."
"뭐가 적임자냐" 반문하니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물러난다는 말을 전할 사람에 적임자"라 말한다. 그러면서 첼레스티노 5세 교황도 1294년 사임했다고 덧붙인다.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다. "변화는 타협이다." "주님이 주신 삶은 변화다." 두 사람은 가톨릭의 보수파와 개혁파가 주고받는 날 선 논쟁을 상징한다. 아슬아슬한 농담도 한다. "5세기 무렵부터 천사들이 사방에 등장했지요. 마치 여기 있는 비둘기처럼요." 교리도 시대에 맞게 변했다는 뜻으로 베르고글리오가 든 예다. 교황 선출 의식인 콘클라베 행사 도중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아바의 댄싱퀸을 흥얼거렸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지만 적극 사임을 반대한다. 교황이 종신직인 이유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 둘 간의 논쟁은 시스티나 성당 안쪽 작은 방에서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해 신의 용서를 구하면서 마무리된다. 교황이고 추기경이지만 자신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죄의식을 씻어 내면서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신의 모습을 그린다. 배달된 피자를 나눠 먹으면서 보통 사람 같은 모습의 교황을 보여준다.
영화는 무거울 듯했지만 경쾌하다. 어려울 듯했지만 쉽게 설명이 됐다. 베네딕토 16세가 독일어로 인사말을 한 흑인 추기경을 만난 뒤 "모두가 라틴어로 말할 때가 좋았다"며 말하는 모습은 꽉 막힌 보수적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라틴어를 선호하는 이유가 "추기경 상당수가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해서"라는 답변처럼, 어찌 보면 가톨릭 스타일 블랙유머도 등장한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라틴어로 된 사임 발표문을 읽어 가자 끝날 때까지 무슨 말인지 몰라 추기경들이 서로 묻는 모습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묘한 장면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 위키백과 베네딕토 16세 교황 / 나무 위키
덧붙임. 영화를 보고 나니 잘 만든 선교 영화 같기도 하다. 두 교황이 월드컵 축구경기를 볼 때 문 밖에 켜 있던 촛불이 꺼지면서 연기가 위로 올라가는 모습에서 신의 존재를 살짝 은유로 보여줬다. 영화 초반 촛불 연기가 아래로 내려갈 때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손짓을 해도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아래로 흘렀다. CG 였겠지만 살짝 흩어지지만 다시 연기가 아래로 흐르는 모습이었으면 어떨까 싶었다. 두 교황을 연기한 두 사람 모두 연기가 훌륭했고 분장 덕도 있겠지만 실제 인물과 흡사해 보였다. 그리고 영화 속 시스티나 성당 내부 장면 등은 바티칸의 허락을 받지 못해 모두가 영화 세트를 제작해 촬영했다. 실물 못지 않은 영화 세트다. [빈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