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에게 레몬을 준다면,

나는 레몬치즈케이크를 만들어 먹겠다

by Lifeartist


If the world gives me lemons,
I'll make a lemon cheesecake and
eat the whole thing!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정말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아무리 내가 태풍 속을 맨몸으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난의 연속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1.

고난의 시작은 일요일 점심부터 시작된다. 순식간에 절친한 친구가 된 R 과 함께 장딸롱 시장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역 앞에서 만난 R 과 나는 서로 우연히 옷도 맞춰 입어서 잔뜩 신이 난 학생마냥 깔깔 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ㅎ


왠 낯선 이탈리아 남자가 갑자기 나한테 아유필리피노? 웨얼알유프롬! 노쓰코리아?ㅎ 를 시전하기 전까지는....


재밌어죽겠다는 그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나의 첫 인종차별은 그렇게 갑자기 시장 한복판에서 순식간에 일어났다.


옆에 있던 R 이 “저 남자는 무시해.”라고 나를 챙겨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만 계속 반복했다.


원래는 시장을 구경하며 에그타르트도 먹고 야채와 과일을 좀 살 생각이었지만, 그 무뢰한 때문에 시장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R 덕분에 에그타르트는 먹을 수 있었다. 에그타르트를 먹는 동안 지난번 피크닉에서 R 이 궁금해했던 초콜릿 과자를 선물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챙긴다며 또다시 깔깔 웃었다. 솔직히 아까 있었던 일은 참 많이 기분 나빴지만 R 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나아졌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예정했던 대로 전에 얘기했던 태국요리점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러다 가는 길에 우연히 이탈리아 스포츠카 축제를 발견해 구경했다. 온갖 종류의 클래식 스포츠카가 길가에 전시되어 있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R 은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었고 나는 옆에서 구경하며 R 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의 일이 부담이 됐을까봐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고 R 은 이탈리아 축제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실컷 구경하고 식당에 도착하면서부터 나는 급격하게 긴장이 풀리며 체력이 소진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밥을 다 먹어갈 쯤 부터 현저히 말수가 줄어든 나 때문에 R 이 눈치를 보는 걸 느꼈어야 했는데...


식당에서 나와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지쳐서 R 의 말을 들으며 리액션만 겨우 했다. 역에 도착해서 내가 안되겠다고 집에 가겠다고 얘기하자 R 이 당황한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하며 황급히 인사를 나누고 웃으며 헤어졌다. 그렇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헤어짐이 R 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이후 장문의 텍스트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첫 인종차별을 경험한 날, 처음 사귄 친구 R에게 절교당했다.




2.

다음날 아침, 하루 종일 날씨는 우중충. 비가 쏟아지고 나는 매우 기분이 안 좋았다. 새벽에 깨서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겠다 다짐하며 아침부터 든든한 한끼를 준비했다.



무기력할수록 더 잘 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나는 아침부터 소고기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로 뜨뜻하게 채운 배를 두드렸다. 잘 먹으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좀만 쉬다가 오후에는 내일 오전에 필요한 여권사진을 찍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점심시간이었고 다시 또 냉장고를 털어 든든한 비빔밥을 해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니 또 움직이기가 싫었다. 다시 누워있다가 또 깜박 잠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오후 4시, 이러다가 사진관이 문을 닫을까 걱정되서 옷을 챙겨입고 우산을 들고 나갔다. 삼십분 거리의 사진관에 방문해 사진을 찍고, 정말 웃기게 나온 내 모습을 챙겨들고 귀가했다. 비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몇번이고 뒤집어지는 우산을 다시 똑바로 피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또 다시 잔뜩 지쳐서 저녁도 잘 챙겨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먹고 남은 구운 야채를 잘게 썰어 볶음밥을 해먹었다. 꿀맛이었다. 하루 종일 배를 든든히 채우고 할일을 끝내고 나니 R 과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R 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R 은 자신만 일방적으로 우정을 주고 있다고 느껴서 상처를 받았다는 게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시 대화내용을 살펴보니, R 은 2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찬찬히 되돌아보니 나와 R 은 여러모로 감정의 속도와 바운더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 서운함을 느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충분히 R 을 소중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고 표현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번 일은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도 여전히 허한 마음을, 전에 매칭된 데이트 상대에게 연락하는 것으로 채우려고 했다. 솔직히 말해 대화는 즐거웠다. 상대가 귀엽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고, 덕분에 오는 수요일 퇴근하고 가볍게 차 한잔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허했던 마음이 덕분에 기분전환되어 즐겁게 하룻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내일 다시 바쁜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3.

아침 일찍 일어나 주한대사관에 갔다. 며칠 전 잃어버린 지갑 속 운전면허를 재발급받기 위한 것이었다. 덕분에 다운타운에 두번째 방문이었다. 출근시간과 맞물려 분주하게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 나라나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다 똑같은 모습이구나 싶었다.


면허를 재발급 신청하고 13$의 추가 지출을 결제했다. 피눈물이 흘렀다. 사실 어젯밤 통장 잔고를 확인하다가 한국과 다른 은행 시스템덕분에 예산을 잘못 계산한 걸 알게 됐다. 다음달 월세를 남겨두고 남은 4주동안 쓸 수 있는 돈이 120$ 남짓이었다. 한국 돈으로 약 12만원. 다행히 교통비, 장보기를 다 지출한 상태라 외식과 쇼핑만 자제하면 일을 구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 지속된 우발적인 지출과 분실로 인해 심적 타격이 참 컸다.


마음은 참 심란한데 날씨는 너무 좋았다. 바로 집으로 향하려던 마음을 접고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이케아로 향했다. 룸메이트와 예전에 논의했던 발코니 테이블을 구매하러 가는 길이었다. 예산이 얼마 없는데도 전에 약속했으니 사러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테이블이 마침 할인을 해서 합리적인 가격인 것도 있었고, 뭔가 지금 당장 할 일이 필요했다.


R의 절교 선언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고, 이케아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또 어떤 남자가 옆에서 치근덕거렸다. 심지어 나는 엄마 아빠랑 영상통화 중이었는데도..!

엊그제의 일을 교훈삼아 철저히 무시했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았다.


이케아에 도착해 엄청난 규모의 쇼룸을 30분동안 헤메다가 겨우 원하는 테이블과 룸메가 부탁한 물건을 구매했다. 쨍쨍한 햇살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다 겨우 무거운 몸을 실었다. 버스 정류장 가는 길에 횡단보도 신호를 바꾸는 버튼이 있다는 걸 신호가 6번 바뀌는 동안 몰랐던 건 덤이다.


그렇게 집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오후 2시가 막 지났다. 점심과 저녁까지 챙겨먹어야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어제부터 너무 세상이 나에게 잔인했다. 더위와 심란함으로 밥 생각은 없어서 대신 다 녹은 초코과자와 초코우유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마음을 달래려 선우정아의 시티 선셋을 듣다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니 조금 괜찮아졌다. 룸메이트가 아이스크림 같이 먹으러 가겠냐고 권유했으나, 재정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가 없어 거절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했던 것 같다. 몬트리올에 도착한 순간부터 2주동안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느라 소모되고 피곤하긴 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사람과의 연결이 참 중요했다. 어쨌든 그렇게 저녁까지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보냈다. 오랫만에 카메라를 키고 나 자신과의 대화시간도 가졌다. 내 감정을 스스로 보듬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다. 다시 또 힘내서 내일을 준비할 힘이 났다.


우선 가장 시급한 일자리를 찾아 레쥬메를 쓰고 여러 흥미로운 일자리에 지원했다. 프리랜서 통역가, 온라인 강사, 콘텐츠 편집자... 등. 시급은 적지만 재택근무 가능하고 스케쥴 조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재밌어보였다. 그렇게 지원을 마치고 나니 그래도 뿌듯함이 들었다. 예전에 고시원 시절도 생각나고, 몇개월 뒤의 내가 이 순간을 되돌아보면서 “그때 진짜 힘들었네.” 하고 웃는 장면이 상상됐다.





4.

그리고 오늘. 아침에 메일을 확인해보니 어제 지원했던 통역가와 온라인강사 인터뷰 요청 메일이 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인터뷰가 잡혀서 들뜬 마음으로 답변을 회신하고 가볍게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모아뒀던 비상금을 해외송금한 게 오늘 캐나다 계좌에 입금이 됐다. 이로써 예산부족으로 인한 조급함은 사라졌다. 휴.. 정말 한숨 돌렸다.


오늘 점심은 K 와 두번째 만남으로, 중고의류 쇼핑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첫 데이트가 있다. 사실 내일 오전 전화 인터뷰가 잡혀서 K 와 약속은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지금 나에겐 연결과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K 는 참 공감을 잘해주는 사람이었다. 지난 번엔 가벼운 만남이었지만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K 라는 사람이 다시 보였다.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데이트 장소 근처에 있던 공원으로 가서 예쁜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 내일 인터뷰를 위해 미리 준비를 했다. 겸사겸사 데이트 상대와 나눌 얘기도 미리 준비했다. 오늘 날씨가 흐리다 그랬는데 4시가 되자 해가 비치며 화창해졌다. 예감이 좋았다. 지난번에 5시 퇴근한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4시 55분에 “나 지금 역 근처 공원에 있으니 여기서 만날까?” 하고 문자를 보냈다. 상대가 확인을 하지 않았다. 퇴근 전에 일이 생겼나보다 생각하고 인터뷰 준비하며 30분을 기다리다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혹시 오늘 만나는 거 힘들어? 그럼 알려줘!


그리고 20분이 지나서 상대에게서 매우매우 미안해하며 다음주로 약속을 변경하자는 답장이 왔다. 그러나 약속시간에서 50분이 지나서 답장이 온 것 치고 내 입장에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답변이었다.


아니... 며칠 전에 우리.. 좋지 않았어? ㅋㅋㅋㅋㅋ 나만 그렇게 느낀거야? 허허허허. 좋지 않은 일도 연속으로 일어나면 현실감이 없는 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한시간을 기다린 게 아까워 주변에 햄버거 맛집이 있길래 가보려고 했다. 햄버거 가게에 도착해 메뉴판을 보는데 가격이 띠용스러웠다. 쉨쉨버거도 이 가격은 안 받았는데...!!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 돈을 쓰고싶은 마음까진 안들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햄버거가 아니라 나를 대접하는 것이었을 뿐인데...

결국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다. 몇시간동안 굶주린 배는 더이상 밥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잔뜩 지쳐버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렇게 블로그에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글로 쓰고 있다. ㅎㅎㅎ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엔 그래도 좀 너무했다 싶다. 20대의 나였다면 지금 눈물바다가 되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한국에 가고싶다고 징징거렸을 것 같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30대의 나는 역시 인생..ㅎ(욕) 하고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참 다행이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도 어른이 된 나는 스스로를 보듬고 회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 점이 시간이 나에게 남겨준 유일한 능력이다.



비록 세상이 나에게 레몬 대신 거대한 레몬트리를 주려고 하지만, 나는 레모네이드를 넘어 레몬치즈케이크까지 만들어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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