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여고생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上)

인간은 심심하면 별짓을 다한다

by 신이정


사람은 심심하면 별짓을 다한다. 18살의 고등학생은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다. 심지어 그게 어둑어둑한 야간자율학습 시간,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있는 학교라면.


나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줄여서 ‘야자’)을 엄격하게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침 8시에 시작되는 0교시부터 밤 23시에 끝나는 야자까지 꼬박 15시간을 학교 안에서 보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등교해 자율학습을 했다(‘자율’ 학습이라는 말이 영 거슬린다).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는 문장은 과장 없는 현실이었다. 누군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한 장소에서 감독을 받으며 15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감옥이라 부르지 않을 근거가 있는가? 우리는 담임선생님께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교실을 빠져나가곤 했다.


야자의 지루함은 우리를 미치게 했다. 영어 듣기 평가에서 1문제 더 맞고, 문학 작품을 하나 더 분석하는 일은 당장에 미칠듯한 심심함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였다. 멍한 눈으로 문제집에 주욱 주욱 줄을 그으며 이 문제가 내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철학적 논제에 빠져있다 보면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밤 9시, 저녁에 먹은 급식은 없는 일이 된 지 오래. 머리는 텅 비었고 몸은 영양부족을 호소하니 당장 뭐라도 욱여넣지 않으면 안 되는 긴급 상황이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라면이 땡겼다.


하지만 이 늦은 밤 학교에서 어떻게 라면을 먹는단 말인가? 드디어 내 인생에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우리는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고 끝내, 방법을 찾았다.


먹을 것을 가지러 나갈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 먹는 전략이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친구 4명이 컵라면 모임을 만들었다.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1인당 1 컵라면을 가져온다.

2. 야자 2번째 쉬는 시간(21시 30분)이 시작되자마자 컵라면을 숨겨 교실을 빠져나온다.

3. 아래층 복도에 있는 정수기 앞에서 접선한다.

4.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채워 빈 어학실에 모여 앉는다.

5. 10분 내에 식사를 마친 뒤 쓰레기를 처리한다.

6. 냄새 제거를 위해 바깥을 한 바퀴 뱅 돌아 유유히 교실로 돌아간다.


컵라면이 보이기라도 했다간 반에서의 인간관계가 흔들릴 수 있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너네만 먹냐? 이 배신자들아 소리가 벌써 귓구멍을 울렸다. 라면 냄새의 강력한 확산력 때문에 들키기도 쉬웠다. 선생님께 발각되면 최소 화장실 청소 한 달 당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만 했다. 발각당할 위험보다 배고픔의 절박함이 훨씬 치명적이었으므로.


작전 첫 개시일.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들고 모인 우리는 완전 범죄를 위해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어학실 창가에 앉았다. 창문으로 하얀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달빛이 실제로 무언가를 밝힐 정도로 밝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어슴푸레한 빛을 받아 꼬들꼬들 곡선을 그리는 부드러운 면발을 젓가락으로 고이 접어 입에 쏘옥 넣었다.


아… 죽인다.


10분 내에 미션을 마치기 위해 덜 익은 라면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먹다 보면 어느새 이곳은 한강 공원. ‘(소곤소곤한 목소리로)야, 너 오늘 김치 육개장이야? 냄새 미쳤다.’ 우리는 큭큭거리며 감옥에서의 해방감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으로 시작했던 컵라면 모임은 두 달 넘게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덜 익은 라면 면발을 와그작 씹어먹는 데 익숙해졌고, 10분이라는 시간이 여유롭게 느껴졌다. 각자 자율적으로 공수해 온 아이템이 하나 둘 추가되기 시작했다. 집에서 공수해 온 총각김치, 배추김치, 갓김치가 놓였고 저녁급식에서 챙겨 온 흰쌀밥을 라면 국물에 말아먹었다.


컵라면 모임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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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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