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여고생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下)

by 신이정


― 너네 수상해.


내 자리에 찾아온 반장이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무슨 말이야? 되묻자 물끄러미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 아니 그냥, 수상하다고.


그 말만 툭 던지고 그녀는 사라졌다. 쎄하다. 우리는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고작 반장 따위 때문에(!) 라면을 멈출 순 없었다. 라면은 여전히 너무 맛있었고, 일탈과 해방감은 매번 상쾌했으며, 오차 없이 성공적으로 모임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어쩔 건데? 선생님한테 이르겠다는 거야 뭐야. 야자시간도 아니고 쉬는 시간이잖아. 우리에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쉴 권리가 있어! 흥분한 우리의 입에서는 배신자(뭘 배신했다는 건지…?), 앞잡이(선생님이 시킨 일인지는 모르지만), 스파이(선생님이 심어놨을 거야 분명히!) 같은 말 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언짢음만 잔뜩 분출하고 별다른 대책 없이 회의를 종료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확실한 오늘의 행복을 놓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어두운 어학실 문을 열어젖힘 당하고야 만다. 반장에 의해서.


― 너네 내가 다 봤어. 나와. 여기서 냄새 엄청나거든?


망했다. 나는 뛰어가서 반장을 어학실에 밀어 넣고 잽싸게 문을 닫았다. 선생님에게 이르는 반장보다 무서운 건, 라면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챌 친구들이었다. 그건 막을 방법도 없었다.


― 야… 배고파서 그래. 우리가 반에 뭐 피해 줬냐? 그냥 이거 잠깐 먹고 다시 열심히 공부하는데.

― 어쩐지 야자 3교시만 되면 너네 다 자빠져서 처자더라.

― 왜 이래 친구끼리. 야. 진짜 우리 순수하게 라면만 먹는다고. 딴 거 없어. 봐봐 네 눈으로 직접.


반장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각종 김치와, 비닐에 담긴 흰쌀밥과, 아직 열려보지도 못한 채 뜨거운 기운을 머금고 있는 컵라면 용기를 봤다.


― 라면만 먹는 거 아니네.

― 야, 김치랑 밥 없이 라면 먹냐? 너도 솔직히 먹고 싶지? 이리 와봐. 같이 먹자.


친구는 컵라면 뚜껑을 과감하게 뜯어 순식간에 고깔모양으로 접었다. 살짝 덜 익은 라면 면발을 넣어 반장에게 건넸다. 아니 먹어만 보시라고. 진짜. 어떻게 우리끼리만 먹냐. 반장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깔을 받아 들었고 이내 목을 젖혀 쭉 들이켰다.


우리는 보았다. 슬쩍 올라가는 반장의 입꼬리를.

전략이 먹혀들었다.


기세를 놓치지 않고 우리는 내 껏도 먹어보라며 서로 고깔에 라면을 담아 건네기 시작했다. 야야. 컵라면마다 매력 다 다른 거 알지? 골고루 먹어봐야지. 어떻게 한 종류만 먹냐 아쉽게. 용의자를 검거하러 온 경찰 치고는 너무나 순순히 반장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모든 라면을 다 맛본 그녀는 어느새 우리와 한 패가 되어있었다. 너도 이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우린 하나다.


― 반장, 너도 같이 먹자. 수요일 이 시간. 알지?

― 그래 컵라면 하나만 들고 오면 돼. 아무것도 필요 없어. 우리가 다 세팅해 놨어.

― 같은 반 친구끼리 좋게 좋게 같이 먹어야지.

― 야, 우리 진짜 딱 깔끔하게 라면만 먹고 헤어진다고. 배고파서 공부가 안 되는데 어떡하냐.


그렇게 우리 모임은 총 5명이 되었고, 학년이 바뀔 때까지 더 이상 누구에게 들키는 일은 없었다.


조용히 빠져나가던 순간의 두근거림, 정수기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던 하얀 연기, 뜨거운 물과 라면스프가 만나자마자 발산하던 강력한 냄새, 어두컴컴했지만 어느 곳보다 안락했던 어학실의 풍경, 고요 속에서 건져낸 덜 익은 라면 면발, 친구들이 가져온 밑반찬, 말할 새 없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국물이 넘어가는 꿀꺽꿀꺽 소리.


그 순간들 덕에 우리는 감옥 같던 학교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친구들과 야밤에 들이키던 컵라면 국물 원샷이 입시 스트레스로 막막하던 마음과 압박감과 초조함을 단숨에 쓸어내려주었다.


라면은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두컴컴한 세상에서도 기어이 나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내어 길을 밝힐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우리 삶에는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하다는 믿음. 거기서 얻은 힘으로 하루, 이틀, 며칠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으리라는 용기. 나는 그때,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그 마음들을 라면으로부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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