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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화자 Jun 12. 2016

글쓰는 할머니의 오늘 이야기(17)

추억-마당 너른 집

마당 너른 집 이야기    

  아이들은 예닐곱 살 쯤 되면 젖니가 빠지면서 영구치가 새로 돋는다. ‘앞니 빠진 갈가지’ 라고 한 동안 놀림을 받는다. 그러다가 얼마 후 새로 돋는 앞니는 어색하게 넓적하다. 한 평생 턱을 받쳐주고 음식을 씹어서 튼튼하게 골격을 지켜 주려면 아이들의 영구치는 어른 치아만큼 튼실해야한다. 넓적하게 못 생긴 치아를 두둔하시느라 할머니는 덕담을 하셨을 것이다.

  “앞니가 넓으면 대문 넓은 집으로 시집을 간단다.”

 대문이 넓으면 대궐처럼 크고 좋은 집이거니... 그러니까 부자로 잘 살 거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도 마당 너른 집에서 사는 건 옛날에 할머니가 하신 덕담 덕분인 것 같다.

  대문이 넓고 마당이 널찍한 이 집에는 식구가 많았다. 병아리를 키워서 토종닭과 오골계의 알을 먹을 수 있었다. 꼬끼오~ 수탉의 소리가 새벽을 알렸고 암탉은 병아리를 내리고 병아리는 커서 또 알을 낳았다. 누군가 키우던 토끼를 두 마리 주면서 토끼집까지 주었다. 토끼는 빠르게 식구를 늘려갔다. 눈이 온 겨울 날 누가 토끼를 가져갔다. 토끼를 훔쳐간 사람은 아마 눈이 온 날 토끼사냥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당 너른 집에 토끼식구가 줄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발효가 잘 된 닭의 배설물은 호두나무를 키웠다. 싱싱한 푸성귀를 밥상에 올렸다. 강아지를 키웠고 큰 개는 강아지를 낳아서 식구가 늘었다.  한 동안 동물 식구들이 북적거리더니 토끼들이 사라지고 병아리와 어미 닭을 없앴고 수탉도 없앴다. 큰 개와 강아지도 보내 버렸다.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마당 너른 집을 지키는 건 두 늙은이 뿐이다.

 거의 사십년을 마당 너른 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 마흔 살이 넘은 자식들이 손자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오면 아파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놀이를 좋아 한다. 흙을 파서 밭을 만들고  메주를 쑤고 김장을 하고 가을에 쌓인 낙엽을 모아서 태우는 불장난을 좋아한다. 섣달 그믐날 돋보기를 가지고 놀던 손자가 불장난 끝에 불을 낼 뻔해서 놀라게 했다. 덕분에 불은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몸소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무가 자라서 숲처럼 우거졌다. 두릅나무와 엄나무가 봄나물을 선물한다. 두릅나무는 한 동안 울타리를 삼을 만 했었다. 그러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이것저것 욕심껏 심은 나무도 너무 크게 자란 건 솎아내듯 또 보냈다. 새들이 날아와서 심심치 않다. 참새와 노고지리와 박새와 까치와 직박구리들이 온다. 작은 새들은 조잘거리고 시끄럽게 깍깍거리는 큰 새들도 모두 내 집에 오는 손님들이다. 그뿐이랴. 개미와 진딧물과 매미들과 숲에서 살고 있는 모기들과 벌레들도 많다. 고추 호박 토마토와 김장밭 사이사이에서 쑥쑥 자라는 잡초와 풀꽃들이 생존의 위대한 능력을 과시한다. 오이 섶과 고추밭 지지대는 부지런한 머슴님 작품이다.  

   

   산천리 종축장에서의 기억은 유년시절의 그리운 추억들이다. 강원도립종축장은 산천리에 있었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 1월에 아버지는 산천리 종축장 장장이셨고 종축장 관사는 마당이 넓었다. 종축장에서는 가축을 우량종으로 보급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기관인 만큼  웬만한 가축은 다 있었다. 아버지는 양봉도 좋아하셨다. 넓은 솔밭과 축사들과 도랑물이 흐르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산천리 월드온천 앞 종축장 터에 갔었다. 관사자리가 어디였는지 모르겠다. 맑은 물이 흘러가던 도랑물도 안 보이고 옛날에 있었던 솔밭은 사라졌다. 사무실과 축사들이 있던 자리도 짐작을 할 수가 없게 변했다. 목부들의 주택은 초가였고 기관의 책임을 맡으셨던 아버지의 우리 집은 다다미방이 있고 전기코일 감은 걸로 물을 덥히던 목욕탕이 있는 기와집이었다. 마당 너른 관사는 일본식 건축물이었다.  육십년이 지난 종축장 자리는 드넓은 시범포가 되어 작물을 심으려고 골을 켜고 갈아엎은 채 말이 없다. 그곳은 육십 여 년 전 일들을 깡그리 잊고 있는 듯해서 허망했다. 1950년 1월의 종축장 공비사건을 팔십대가 된 그 동네 노인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누구인들 나만큼 그 시절을 추억하겠는가.

 

 나의 십대와 이십대를 키워준 소양로 2가 마당 너른 집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을 구입한 것이었다. 1950년 1월에 종축장에 공비가 나타나서 가축과 사람을 잡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직후에 시내로 이사를 했고 몇 달 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벚나무 울타리에 벚꽃이 보기 좋았었다. 회양목과 등나무와 정원을 아기자기하게 꾸몄던 일본식 주택은 6.25때 부서져서 다시 지었다. 양봉은 아버지의 취미이고 부업이셨고 강원도농촌진흥원에서 양봉을 지도보급하신 공로가 크시다. 한때 마당 너른 집에는 백여 群이 넘는 벌통들이 있었고 벌들은 강원도 산골에 원정을 다니면서 꿀을 모아 들였다.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나 혼자 집에 있는데 벌들이 살림을 나고 있었다. 한 떼의 벌 무리가 웅웅거리면서 날아오르더니 높다란 은행나무에 뭉치기 시작했다. 오월에는 새 여왕벌에게 살림을 내 주고 집을 나가는 묵은 벌 식구들의 분봉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여왕벌이 식구들을 인솔하고 집단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꿀을 바른 소비를 바구니에 안치고 장대 끝에 올려서 벌들을 받아 내렸다. 새 벌통에는 여벌의 소비를 넣어주고 꿀 냄새로 벌들을 유인해서 벌통에 넣어주면 벌들의 분봉작업은 안정적으로 끝이 난다. 나머지 벌들은 여왕벌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여왕벌이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가을엔 대륜국화들이 너른 마당 가득한 것도 볼 만했었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 준 마당 너른 집들은 모두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왜 어린 시절의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지는가.  

  

  오늘도 마당 너른 집에 손님들이 찾아 왔다. 참새들이 재재거리면서 나방이를 쫓아서 곡예비행을 한다. 은행나무에서는 까치 식구들이 반가운 손님이 올 거라고 깍깍거린다. 벌과 나비가 날아오고 개미들도 바쁘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운다. 덩굴손을 내밀어 오이 섶을 타고 올라가는 오이포기와 호박덩굴이 열매를 키운다. 육종기술 덕분에 마디마다 열매를 달고 있다. 암꽃들 세상이다. 심심하면 푸른 잎 사이에서 날마다 몰라보게 커가는 열매들을 들여다본다. 토마토는 감자와 사촌쯤 되는 것 같다. 꽃 모양이 닮았다.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고 뿌리에는 감자가 열리는 식물을 만들 거라는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나 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마당 너른 집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추억을 만든다.

대궐처럼 크고 좋은 집은 아니지만 대문이 넓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사는 건 옛날에 할머니 덕담 덕분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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